2013년 5월 12일 일요일

형통의 함정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시105:20)

요셉 이야기다. 그는 고진감래 혹은 형통의 대명사다. 형제들의 배신과 주인의 모함과 정치권 참모들의 치명적인 망각으로 요셉은 어둡고 외롭고 괴로운 고난의 가시밭길 여정을 전전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열방의 통치자인 애굽의 왕은 요셉을 감옥에서 발탁하여 최고위 실세의 자리에 앉혔고 애굽의 모든 백성들이 요셉의 허락과 명령 없이는 수족을 놀리지 못할 정도로 제어할 권세가 없는 제국의 실질적인 일인자로 만들었다. 왕이 요셉보다 높음은 보좌 뿐이었다. 이런 반전의 인생을 읽는 독자들이 일순위 롤모델로 요셉을 손꼽는 것은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겠다.

형통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모두가 형통을 추구한다. 형통의 역방향 인생을 갈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이런 기호의 다수성 때문에 형통이 나쁘지 않다고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전도서가 형통을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명시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물리적인 형통이 인생의 목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함정이다. 이는 요셉의 고위직과 명예와 권세와 짜릿한 인생역전 스토리에 흠모의 입맛을 다시는 경우를 일컫는다. 형통이 좋은 것이라는 이유로 수단적인 형통을 인생의 목적으로 둔갑시켜 그 형통에 발목이 붙잡히는 민망한 사례들이 적지가 않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때때로 교회의 본질마저 훼손하는 실정이다.

시편 105편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 대해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신' 형통의 이유가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과 삶으로 먹고 마시는 목적의 수단으로 형통의 우연적인 동원이 있었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겠다. 모세처럼 살인한 적도 없고 다윗처럼 간음한 적도 없고 비열한 방법으로 충복의 존재를 제거한 적도 없고 바울처럼 하나님의 교회 핍박에 공권력을 행사한 적도 없었던 거의 무흠에 가까운 요셉을 믿음의 모델로 삼겠다는 것에 어떠한 이의가 있겠는가. 그러나 거기에 저자세로 도사리고 있는 함정은 조심해야 하겠다.

그 함정은 바울의 아름다운 고백에서 가장 뾰족하게 지적되고 있다. 그가 자신에게 유익하던 소유를 배설물 수준의 무익한 것으로, 오히려 위해한 것으로 여긴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싶어서다. 바울이 소유하고 있었던 학식과 시민권과 열심과 고위직과 출신은 모두 그의 형통을 지탱하던 요소였다. 당시 사람들은 바울의 존재감을 이런 화려한 스펙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 그의 고유한 '바울신학' 속에서 이해하려 한다. 이는 칼빈이 늘 교회의 보편적인 진리를 섬기려고 했지만 후대에 '칼빈주의 신학'으로 특화되는 것과도 별반 다르지가 않다.

설명의 필요성 때문에 고유한 이름이 수식어로 사용된 신학의 불가피한 운운이 허용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아예 표적으로 삼아 돌진하는 것은 '신학적 형통'의 함정에 스스로 걸려드는 셈이겠다. 나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의 대부분이 그리스도 이상의 목적으로 추구되고 있다면 무익하고 유해한 배설물에 불과하다. 형통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는 우연적인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형통은 신앙의 표적이고 그 형통에 협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가차없이 버려진다.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은 나를 형통으로 안내하는 언제든지 해고될 하인이나 운송용 수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만세 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의 인생 설계도로 삼는 것은 땅에서 얻어질 수 없는 지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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