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9일 수요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다

내가 잠잠히 있었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아는구나 (시50:21)

성경은 주님께서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거짓이 없으시고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후회도 없으신 분이라고 명토박아 두었다. 이에 대하여 지혜자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권하였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생의 길이나 생각과는 하늘과 땅의 무한한 격차만큼 다르다는 언급으로 무례한 비교 가능성을 일거에 차단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울고 슬퍼하고 근심하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듣고 보고 만지고 먹고 마시고 아신다는 인간의 성정에 적응하신 표현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자비로운 소통의 술어들 때문에 마치 인간과 하나님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을 인간 다루듯이 설득하고 달래고 아부하고 거래하고 선악의 구별에 있어서는 맞짱도 불사하는 오만의 극치를 이따금씩 연출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과 소통 가능한 인간을 만드시고 스스로 계시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와 연약함을 따라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의 언어와 어법을 따라 당신을 알리신 것은 그 자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의도하신 것이 아니셨다. 스스로를 낮추신 적응의 목적은 타락한 인간의 자리에 영원한 삶의 돗자리를 깔고 더불어 영원토록 거기에 머물자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관대한 적응이 인간 문맥에 갇혀서는 아니된다.

마지막 날에 아들을 보내시고 죄가 없으신 것만 다르되 우리와 한결 같이 동일하신 성정을 입으시고 스스로를 죽기까지 낮추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도록 낮아진 존재의 밑바닥에 거하는 우리들의 심각한 구제불능 상태를 알리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며 나아가 더불어 밑바닥에 머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까지 우리를 부르시는 무한한 영광의 초청이다.

하나님은 무궁한 자비와 긍휼로 길이 참으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난잡한 행실과 삶에 대한 신적인 승인으로 간주한다. 아예 하나님도 자신들과 동류라는 못박는다. 우리의 속사정도 다르지가 않다. 대체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죄악을 저질러도 사람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며 담대히 저지른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해 졌다"는 전도자의 지적은 뾰족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한편 하나님의 더딘 징벌과 길이 참으심은 즉각적인 인과응보 때문에 눈치를 보며 웅크리고 있던 인생의 본색이 연출과 가식의 탈을 벗고 있는 그대로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라고 생각한다. 인간 편에서는 진노의 날에 임할 형벌의 축적이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부끄럽고 부당한 온갖 일들에 광기를 부려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심은 하나님의 항구적인 인내와 엄중한 형벌이 맞물려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하나님은 인생과 다르시다. 때때로 응징의 칼을 가실 때에는 말이 없으시다. 사랑 때문에도 그러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잠잠함은 인생과 동류라는 증거가 아니겠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 예수에게 이르러야 한다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창조와 성경의 모든 계시는 하늘의 높으신 하나님께 오라는 초청이다. 계시는 우리에게 적응하신 것이나 우리로 하나님께 적응하게 만든다. 그러니 하나님을 우리의 자리로 끌어 내리는 불경은 삶이든 해석이든 극히 삼가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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