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5일 일요일

일상의 기독교적 재조명이 필요하다

1. 밥하고 빨래하고 설겆이도 도맡아서 하시는 '괴짜' 선배님이 계시다. 이렇게 전자제품 관련 가사들을 직접 행하면서 주부들의 고뇌와 필요를 경험하고 읽어내는 것이 30여종 이상의 특허출원 비법이란 알짜배기 정보도 곳곳에 전파하고 공유하는 분이시다. 그분에게 일상은 가치와 의미의 출처였다. 가장 일상적인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 부분의 소비자란 이야기고 거기에서 한 발짝만 앞서가면 대박이 난다는 건 삼척동자 고개도 끄덕이는 사실이다.

2. 플라톤의 철학은 이론의 상아탑 축조와는 정반대로 실천적인 삶이라는 목소리를 내시는 참으로 존경스런 전천후 박학다식 철학자가 계시다. 철학의 중년을 넘어 완성의 고지에 거의 도달하신 그분의 붓은 지금 일상 번역으로 분주하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웃고 자고 주거하고 옷입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은 그분이 판독하는 최상의 정직한 철학 텍스트다. 지금까지 그분이 생산한 철학 이야기는 마치 일상 벗기기의 준비운동 내지는 예고편이 아닌가도 싶다.

3. 연구 실험실이 목양실 옆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천재 신학자가 계시다. 과학은 신학의 마지막 대화자로 모든 학문을 블랙홀 수준으로 흡수하고 있으며 일상은 그런 대통합적 과학의 최첨단 분야가 되었다는 문명의 현주소를 고도의 경건과 박학으로 읽으시는 분이시다. 기라성 같은 세계적인 노벨상 수상 및 입후보 과학자들 모임에서 발표도 하시고 논문도 게제하는 그분은 일시적인 기적을 일상이란 항구적인 기적의 맛배기라 하시었다.

4. 사도들도 풀기 어려운 것이 있어서 어거지 해석의 위험성을 경고해야 할 정도로 진리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의 극대치를 논구한 사도가 있었다. 그는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너무도 깊어서 측량할 수 없고 그의 길은 추적되지 않는다는 백기투항 멘트로 교리적 논의를 종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삼층천에 준하는 경지까지 이르렀고 그러므로 우리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하나님 경외와 경배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5. 몸은 일상의 다른 표현이다. 최고의 사도가 신구약 전체의 진리를 종합하고 그것에 준하는 우리의 마땅한 도리와 본분으로 몸을 산 제사로 드리란다. 일상을 주목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을 사소한 것, 무가치한 것, 평범한 것, 지루한 것,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기 싶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높이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일상에서 찾으신다. 하나님이 주목하면 사단도 주목한다. 하나님의 기쁨이 큰 것일수록 사단의 속임수는 보다 간교하다.

6. 일상은 너무도 소중하다. 문화는 일상이다. 문화의 중심부에 가정이 있다. 가정이 무너지면 문화가 무너진다. 사단이 가정에 왜곡과 파괴의 군침을 흘리는 건 당연하다. 지금 가정의 정체성과 질서가 심히 흔들리고 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지식과 교양과 양심과 문화를 배양하는 가정의 소중함이 무시되고 세상에서 매겨진 가치의 유행성 순번을 따라 죄마저 인간의 위엄과 존엄성 일번지로 간주하는 사회적 합의점이 세상 곳곳에서 선진국의 척도처럼 앞다투어 공포되고 있다.

7. 죄는 죄다. 다윗의 고백처럼 죄는 본질상 하나님을 향한다. 죄의 여부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늠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라고 규정하신 것을 죄라고 고백해야 한다. 여기에 다른 이야기를 섞어서는 아니된다. 사실 가정보다 근본적인 일상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본성이 죄로 물들었다. 우리는 본성의 차원까지 죄와 친숙하다. 그래서 가정이 없는 사람들도 피해갈 수 없는 일상이 본성이요 죄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인간의 본성과 죄문제의 왜곡은 일상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겠다.

8. 예수님은 죄라는 범인륜적 일상을 해결하러 오셨는데, 죄악된 본성에 왜곡이 가해지면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은 헛다리를 짚으신 일이겠다. 만세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죄에서의 자유라는 구원도 불필요한 일이니 세상의 일에서도 통치와 섭리의 손을 거두셔야 하시겠다. 죄문제를 건드리면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님의 존재와 행하시는 일에 불경한 도전의 칼끝을 겨냥하는 셈이겠다. 과도한 비약적 풀이라고 반박해도 좋다. 원하시는 대로 생각해도 자유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9. 나에게는 일상이 너무도 소중하다. 희귀한 전문가용 진리의 특정한 조각이 아니라 모든 진리가 개입하고 합력하는 현장이 바로 일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죄도 거기에 개입한다. 일상이 너무도 신비롭다. 오늘날의 과학이 신학보다 앞질러 일상에 눈독을 들이고 최상급 의미를 투하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일상의 기독교적 재조명이 저자권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겠다. 일상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10. 삶을 철학으로 이해하는 철학자는 모든 분야에 관여한다. 일상을 신학의 대상으로 주목하는 신학자도 모든 곳을 진리로 조명해야 한다. 신학의 현장은 일상이다. 진리가 진동하는 현장도 책상과 학회가 아니라 일상이다. 신학의 목적을 실천으로 이해한 믿음의 선배들이 제공하는 통찰은 수백년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번뜩인다. 사람은 사람이고 동물은 짐승은 짐승이고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이고 남편은 남편이고 아내는 아내이고 부모는 부모이고 자녀는 자녀인데 이걸 강조하면 법에 저촉되는 뒤틀린 일상의 시대가 지금이다.

11. 할 일이 태산이다. 죽는 날까지 신학의 붓을 꺾지 못하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