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일 금요일

진주상인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샀느니라 (마13:46)

예수님은 땅의 신비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천국의 심오한 세계를 비유로 설명하는 중에 농부와 상인을 언급한다. 농부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을 우연히 발견했고 상인은 진주라는 특정한 대상을 찾다가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천국의 성격은 수동성과 능동성이, 소극성과 적극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동일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밭과 진주를 접수했다.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도 아니고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게 예수님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오직 선택하신 백성에게 지각과 출입이 허락되는 전적인 은혜이다. 농부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이 있는지도 몰랐었고 필요도 몰랐었고 구하지도 않았었다. 그런 보물과의 만남은 인과를 읽어낼 수 없을 때에 우리가 이름을 붙이는 '우연'이란 섭리로 찾아왔다. 그래서 은혜인 줄도 모를 정도의 은혜이다. 보물이 평소에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눈에는 가려졌던 것임에 분명하다.

상인의 경우에는 다르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떨어지는 설명이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상인이 보였던 진주의 집요한 추구는 자신의 직업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가치추구 활동의 일환일 뿐이지 천국의 실체를 스스로 알고서 자기 힘으로 찾아낸 행보로 보기는 곤란한다. 단적인 증거로서, 기대하지 못했던 "극히 값진 진주"와의 일상 단절적인 만남과 자기의 모든 소유까지 댓가로 지불하는 극단적인 거래는 평소의 이윤추구 행위와는 구별된다. 진주의 발견이 일상의 연장처럼 보이는 것은 범부들도 삶의 자리에서 혹 더듬어 쉬 발견할 수 있도록 가까이 오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봄이 타당하다.

천국이 은혜로 알려지고 주어진다 해서 장터의 싸구려 물품으로 취급하는 것은 무례하다. 기존의 모든 삶과 가치를 무익한 것으로 여겨야 할 정도의 값진 진주가 천국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제자도의 필수 항목으로 언급되고 있음도 동일한 맥락이다. 김성수 교수님은 이와는 대조적인 사례로서 천국을 팥죽 한 그릇과 거래한 에서의 망령된 행실을 꼬집었다. 천국을 배설되고 말 먹거리 수준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우리에게 생존의 기반이 바뀌었다. 밭을 접수했고 기존의 진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진주 취급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천국과 세상의 적당한 지점에서 어정쩡한 양다리 걸치기 자세로 미지근한 삶을 지속한다. 생업을 접고 집을 팔고 가족을 화끈하게 떠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주님께서 거하시는 우리는 각자가 땅에서의 천국이다. 삶의 양태는 동일해도 질은 현저히 달라졌다. 요지는 그런데도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진주를 산 상인의 처신처럼 천국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거다.

슬프지만, 어쩌면 아직 우리가 천국이 뭔지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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