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6일 월요일

예수님의 지혜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7)

이 질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판정을 빌미로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할 저의를 가진 바리새인 및 서기관의 도전을 뒤집으신 예수님의 역습이다. 짤막한 단문의 위력은 대단했다.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외에는 정죄의 돌을 거머쥔 자들이 모두 떠나갔다. 여인을 두둔하면 모세의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여인을 무리들과 더불어 정죄하면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던 메시지와 스스로 모순되는 코너에 몰린 예수님의 사면초과 사태에 한판승 쾌재를 준비하던 자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다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다.

예수님은 논박의 달인이다.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지 않았고 현란한 언어의 수사학적 설득력과 예리한 논리의 날카로운 분석에 호소하신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접근법은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한번도 포기되지 않았던 인간의 죄악된 본성, 그것만 건드리면 어떠한 자랑과 교만과 자만도 수치의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인간 정체성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추악하고 은밀한 죄악상을 일일이 거명하며 고발하는 식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논적들의 심기는 뒤틀리고 '그런 적 없고 기억도 안난다'는 망각의 이름을 빗대어 탄력을 받은 거센 반발의 집단적인 물결을 감수해야 하셨을 것이다.

그런 반발을 촉발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느끼도록 하는 예수님의 어법에는 신적인 위엄이 있었고 변론할 때에 이웃의 세세하고 은밀한 치부는 드러내지 말라는 지혜자의 금언도 빛을 발하였다.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고 생각과 도모의 길을 아시는 '신인(God-Man)이신 예수님은 고발자의 무례하고 불경한 속내를 읽고 계셨으나 그것을 직접 겨냥하지 않으셨고 공의와 자비의 취사선택 구도에 휘말리신 것도 아니시며 인간과 대등한 자리에서 논증의 고지를 점하려고 논지를 펼쳐 결국은 인간적인 질문이 파놓은 함정의 틀에 갇히게 되는 대응도 피하셨다.

난관은 언제나 주님의 지혜가 번뜩이는 현장이다. 사랑과 공의 사이의 양자택일 반응을 기대하던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근본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던지셨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다. 인간의 묻고 답하는 논박의 문맥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인간적인 논증적 사고의 중단을 촉구하는 탈문맥적 어법이다. 물론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은 증인이 우선적인 정죄의 투석을 가하라는 신명기에 명시된 율법의 관행(more legis)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의미에 있어서는 1) 죄인인 인간은 심판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 2) 공의와 사랑은 대립이나 취사선택 문제가 아니라는 것, 3) 죄가 노출되고 은폐되는 것의 차이는 인간의 눈에만 그러하고 하나님의 눈에는 다르지 않다는 것 등이 암시되어 있다.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사람들도 만나지만 진리를 가지고 진리를 반박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후자가 더 난감하다. 성경에는 문맥에 따라 의미는 다르지만 동일한 표현들이 정반대의 의미로 구사되는 경우가 간혹 등장한다. 그럼 입맛에 따라 하나는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분들이 다가온다. 그들의 입장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셈이 되고 친구도 잃는 결과가 빚어진다. 반면 동의하면 성경의 다른 부분을 부정하여 결국 성경의 모순에 찬동하는 셈이 되는 난처한 상황에 봉착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자리에서 사태를 분석하고 해법을 추구하는 바리새인 및 서기관의 문법을 존중해 주면서도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성육신 사랑의 기조는 꺾지 않으셨다.

참으로 주님은 지혜 자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으나 예수님의 신적인 위엄 담지자는 아니며, 예수님의 어법을 우리의 입술로 카피해도 동일한 위력이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스게야의 아들들이 경건의 능력도 없이 바울의 모양만 취했다가 낭패를 당한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것이 최상이다. 달리 표현하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란 이야기다. 내 입술과 내 생각과 내 의지가 동원되나 주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발휘되는 수단이요 통로로서 주님께 드려져야 한다. 방대한 지식과 반듯한 논리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바울의 고백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는 게 해법이다.

주여, 언제나 나의 지혜가 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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