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일 토요일

예수님의 두 본성 이야기


The Doctrine of Incarnation 수업에서 Feenstra 교수는 성육신에 대한 아퀴나스 입장은 카톨릭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콜라적 문답법을 통해 아퀴나스는 성육신 교리를 정교하고 조직적인 구성을 가지고 전개한다. 수많은 교부들과 철학자들 자료들이 그의 글에 현란하게 등장한다. 같은 어거스틴 글에서도 자신이 주장하는 교리적 입장에 따라 선택적인 자세를 보인다.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자신의 신학으로 교부들의 사상을 정화시켜 대화하는 성격을 유지하는 아퀴나스의 학문적 자세는 지금도 그의 글을 읽는 이들에게 탄성을 자아낸다. 비록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언어와 논리를 표현의 방식으로 옷입고 있지만, 이성의 한계를 넘어가는 진리에 접근함에 있어서 각종 이성의 도구들을 동원하기 이전에 성경적인 입장을 먼저 취하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특별히 성육신, 하나님의 거룩한 2위격이 육신을 취하여 연합하는 것의 적합성을 따지는 일종의 존재론적 물음과 반론에 답하면서 목적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는 말이다.

고도의 신비적인 삶의 요소와 지칠 정도의 딱딱한 그러나 정교한 논리적 철학적 글쓰기가 아퀴나스 안에서 만난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 그의 글을 접할 때마다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예수님의 전지성과 관련하여 질문을 던졌다. 성육신 교리를 삼위일체 교리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원하여 던진 하나의 단편적인 사례이다. 마태복음 24 36절에는 날과 시는 아무도 모르는데 천사들과 아들도 모르지만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구절이 나온다. 예수님의 지식은 주입된 것인가? 생득적인 것인가? 내재적인 것인가? 습듭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의 문맥에서 구절에서 어거스틴 입장을 편들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의 신성을 따라서가 아니라 인성을 따라서 말하신 것이며, 여기서 '아버지' 용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첫번째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하나님을 대하여 호칭할 아버지란 단어를 사용하는 그런 차원에서 언급된 대상이기 때문에 날과 시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가 신성을 따라서는 배제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했다. 그러나 Feenstra 교수는 신성과 인성의 구분보다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person or suppositum 가지신 인격자 그리스도 예수를 언급하며 도식적인 해석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성경은 그것까지 고려되지 않고 기록이 되었지만 후대의 신학적 입장이 구절에 반영되어 해석의 형태로 나타나는 일종의 사색적 확대가 교리적 틀을 옷입고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말이다.

아퀴나스의 글과 더불어 Eleonore Stump 글을 읽었다. 그녀의 논문 요지는 아퀴나스의 성육신 교리가 그의 형이상학 개념에 지배적인 의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체는 실체적인 형식에 의해 항상 개별화 된다(a substance is always individuated by its substantial form) 것이다. 동시에 실체적 형식은 질료에 의해 개별화 된다(substantial forms are individuated by matter) 한다. 사물의 본질은 그것의 종명(species name) 의해 지시되고 그것의 실체적 형식에 의해 주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어떤 것이라는 주장도 첨가한다. 그리고는 특성의 개념을 가지로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부분이 분리적인 취득을 통해 가지는 특성과 2) 특성이 전체에 속하였을 때에 부분이 가지는 특성. 여기에 복잡한 문장이 하나 추가된다. 전체의 특성은 개별적인 것에서 또는 구성적인 부분에서 취해진 특성보다 어떤 것의 기능이라 한다. 논문의 저자는 이성적 본성의 개별적 실체(an individual substance of a rational nature) person 대한 아퀴나스의 기술적 개념으로 규정한다. 그리스도는 복합적인 실체(composite substance) 가지는데 그것은 인간의 영혼과 그리고 신성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신성에 부합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2위격은 그리스도 예수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요소라고 한다. 논문의 말미에서, 그녀는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연합을 실체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 한다.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의 공존을 설명하는 예로, 제한적 능력과 무제한적 능력의 공존을 언급한다. 특성들은 아무런 모순 없이 그리스도 안에 돌려진다.

정말 복잡한 주장을 난해하게 주장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신성과 인성의 위격 안에서의 공존은 모순이 아니라는 말 되겠다.

수업을 끝내면서 공허한 마음이 엄습한다. 주님께서 땅에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오신 것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과연 세상의 무지한 물음과 냉소적 질문에 혼혈을 기울여 변증적인 답변을 마련하는 것이 유혹은 아닐까, 최소한 낭비는 분명했다. 주님께서 육의 몸으로 오신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며, 섬김을 받으려고 것이 아니라 섬기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려는 것이다. 성육신의 보다 풍성하고 놀랍고 신비로운 진리와 은혜의 부요함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거짓과 속임수가 던지는 유혹적인 물음에 대응해야 것이다. 주님은 오셔서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하셨다. 지금도 주님이 안에 성령으로 계셔서 영원토록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성육신의 의미가 역사의 시점에서 일어난 물리적인 사건이 아니라 전후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섭리가 정점을 이룬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나...


2008년 10월 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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