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일 토요일

멀러 교수님의 Was Calvin a Calvinist?

작년 11월초에 멀러 교수님이 한국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멀러 교수님의 강의는 정말 강하고 많은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육중하게 실려 있었으며 강의안을 읽어가는 목소리는 전사의 전투적인 기운까지 뿜어 내었다.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지만 청중들은 멀러 교수님의 강의에 압도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내용은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겠다.

 칼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는 칼빈주의자인가?
 핵심: Calvinism이라는 말의 의미가 다양하다

 1. 칼빈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지칭하는 말로서의 칼빈주의 ‘칼빈주의’ 용어가 칼빈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입장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칼빈은 칼빈주의자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Peter Toon 과 Basil Hall이다. 이런 입장의 문제점들

1-1. 칼빈의 완벽하게 조화로운 신학을 개혁주의 전통에 속하는 다른 신학자들, 쯔빙글리, 오클람파디우스, 부처, 불링거, 버미글리, 무스쿨루스, 우르시누스 등의 소위 보다 덜 조화로운 신학과 대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

1-2. 칼빈의 신학을 현대 슐라이어마허나 바르트나 벌카워 등의 신학적 체계의 원형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1-3. 칼빈은 새롭고 특별한 개인적 신학을 구축하지 않았다: 독특하고 이단적인 기독론과 삼위일체 교리를 펼쳤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살아남지 못한 것을 기억하라. 칼빈의 신학에는 고유한 요소보다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신학과 유사한 것들로 충만하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 지나친 비중을 두고 칼빈을 연구한 자들이다. 그의 논문들과 설교들과 주석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2. 칼빈 후계자들의 신학을 지칭하는 말로서의 칼빈주의 이런 주장은 칼빈을 칼빈주의자가 되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칼빈은 후기 개혁주의 신학을 위한 규범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도 칼빈의 지적 복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라는 것은 칼빈 자신뿐만 아니라 그렇게 불리우는 자들이 결코 즐겨 불리우기 원하였던 호칭이 아니었다. 칼빈은 자신이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것을 일종의 모욕으로 여겼으며, 자신의 신학은 보편적 진리의 표현으로 생각했다.

‘칼빈주의’와 ‘칼빈주의자’라는 용어는 칼빈을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서 언급된 말이다. 예를 들어, 1595년에 윌리암 바렛(William Barrett)은 칼빈과 버미글리와 베자와 잔키우스와 유니우스의 가르침을 공격할 때 그들을 ‘칼빈주의자라는 혐오스런 이름으로 불렀다(odioso nomine appellans Calvinistas)’고 말한다. 칼빈과 동일한 신학 전통에 속하였던 후기 학자들은 자신을 참된 보편적 교회의 '보편적 개혁주의자(Reformed Catholics)로 규정했다. 이 용어는 보편적 교회의 개혁되지 않은 로마교회와 구별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었다. 리베투스는 칼빈을 ‘우리의 종교’의 저자도 지도자도 아니라고 하였다.

정통주의 시대 이후, 18-19세기에 자칭 칼빈주의자들이 범람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예정론을 지지하기 때문이며, 또한 알미니안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즉 '칼빈주의자'는 칼빈의 신학적 입장과 내용을 그대로 전수했기 때문에 갖다붙힌 호칭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정통이란 의미에서 변증적인 용법으로 사용한 호칭이라 함이 더 옳아 보인다.

우리가 칼빈주의자라고 부르는 16-17세기의 많은 학자들은 자신을 칼빈 추종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쯔빙글리, 부처, 오클람파디우스, 파렐, 무스쿨루스, 버미글리, 불링거, 아 라스코,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장키우스, 폴라누스, 심지어 베자의 경우에도 자신을 칼빈의 후계자 또는 칼빈주의자라 부르지 않았다.

질문: 칼빈주의자들은 정말 칼빈주의자들이었는가?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가 되고자 의도한 적이 있는가?
멀러의 견해: No

3. 개혁주의 신학을 가리키는 말로서의 칼빈주의 이런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Perry Miller, John McNiell, Philip Benedict 등이다. 킬빈과 그의 신학적 궤적을 밟아온 후기 학자들은 개혁주의(Reformed)라 불리울 수 있다. 멀러는 칼빈과 후기 개혁주의 학자들의 관계성을 3가지 관점에서 탐구한다: 작정론 또는 예정론, 제한속죄, 그리고 언약신학. 19-20세기 칼빈 학자들은 칼빈이 예정론의 위치를 신론과 분리하여 보다 신앙적인 위치로 옮겼으나,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을 신론과 가깝게 두고 그것에 의존한 신학적 체계를 구성한 것처럼 주장하여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은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둘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칼빈은 신학을 언약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인문주의 태도를 취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적이며 스콜라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은 무제한적 속죄를 주장하는 반면,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 중심적인 신학은 제한적 속죄를 주장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3-1. 작정론 또는 예정론 문제의 학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주의에서 예정론 중심주의로 이동한 책임을 베자에게 묻는다.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3-1-1.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본 구원론
3-1-2.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요 신학의 중심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

전자에 대해서는 칼빈과 후기 개혁주의 학자들이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후자에 대해서는 칼빈이나 후기 개혁주의 학자들 모두에게 적용할 수 없는 중심교리 이론에 불과하다. 칼빈은 인문주의, 후기 칼빈주의자들은 스콜라주의라는 구분도 정당하지 못하다. 어떤 학자들은 칼빈을 심리학적으로 구분한다: 인문주의적이고 은혜롭고 언약적인 칼빈, 어둡고 스콜라적이고 예정론적인 칼빈. 이런 구분을 가지고 그들은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앞부분의 칼빈은 간과하고 뒷부분의 칼빈만 계승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3-2. 제한적 속죄 TULIP은 19세기 이후 Anglo-American 기원을 가지고 있는 용어이다. 칼빈, 베자, 도르트 신조, 그리고 16-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 중에 어떤 사람도 전적 타락이나 제한적 속죄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적이 없다고 멀러는 강하게 주장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온 세상의 죄를 사하기에 충분한 값을 지불하신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았다. 칼빈주의자든 알미니안주의자든 예수님의 죽으심이 온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칼빈은 속죄에 대한 예수님의 죽으심의 충분성과 유효성 구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알미니우스가 제기하고 도르트 신조가 답변한 물음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온 세상의 속죄에 충분한 것이냐'가 아니고 '그 효력이 일부 사람에게 제한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알미니안 입장은, 그 효력은 '사람들이 믿느냐 안믿느냐'의 선택에 대한 신적 예지에 근거한 예정론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의 입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력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만 제한된다는 것이다.

3-3. 언약신학 칼빈은 일방적 언약과 쌍방적 언약의 두 측면을 동시에 언급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이 나타나는 그의 주석을 참조하지 않은 게으른 학자들은 칼빈과 후기 개혁주의 학자들을 이런 식으로 구분한다. 즉 칼빈은 언약의 일방적인 이해만 가지고 있었는데 후기 개혁주의 학자들은 일방과 쌍방을 구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Wayne Baker와 James Torrance가 대표적인 학자이다.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개혁주의 전통과 루터주의 전통과 로마 교회의 신학에 잔존해 있는 범 교회적 신조적 보편성(ecumenical and creedal catholicity)이라는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와 후기 종교개혁 시대의 고백적 전통 사이에 있는 광범위한 연속성을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적인 연대를 보여주는 칼리칸 신조와, 벨직 고백서와, 스코틀랜드 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영국 국교회의 39개신조 등이 보여주는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적인 연대라는 공공의 신학적 토대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연속성은 칼빈의 개인적인 사상에 기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보편성에 기초한 것이다. 칼빈은 자기가 속한 시대와 끊임없이 대화한 사람이다. 거대한 개혁주의 전통을 고안한 사람도 아니며, 유일한 목소리도 아니며, 그것의 발전을 위한 규범도 아니었다.

칼빈은 칼빈주의자가 아니었다. 칼빈주의자들도 칼빈주의가 아니었다. 칼빈과 다양한 개혁주의 고백들과 16-17세기 소위 칼빈주의자들은 모두 개혁주의 전통이라는 공동의 발판을 딛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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