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일 토요일

정의론 첫수업을 들으며


정의론 수업 첫시간을 가졌다

흥미로운 논의가 많았다. 그러나 대화의 테이블에 올려지진 않았지만 친구 제임스와 대화하는 , 월터의 거대한 프로젝트에 대해 더듬어 있었다. 핵심은 신존재 증명이다. 월터의 핵심적인 주장은 정의가 내재적 권리라는 바탕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리를 개인에게 균등하게 돌리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여기서 외면적 화두는 물론 정의이다. 그러나 정의를 설명함에 있어서 월터가 은근히 우리로 전제처럼 수용하게 만드는 키워드는 내재적 권리이다. 권리는 모든 계층과 시대와 신분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권리이며 어떤 것에 의해서도 거부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권리의 근원과 관련하여, 월터는 인간의 뜻이나 노력이나 행위로 주어지는 것도 그렇게 취득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 그것은 "도무지 주어지는 않는 (not conferred at all)"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3 존재에 의해 부여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그런 권리의 수여자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이 당연히 이어진다. 모든 자들에게 가장 근원적인 권리를 자의 존재를 부인할 없게 된다. 여기서 존재의 정체성을 수는 없지만 그런 존재의 존재성을 부인할 수는 없게 되는 소득을 건진. 마치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라고 부르며 종교성을 발휘하던 그때와 동일하게 지금도 그런 존재의 존재성을 부정할 없으면서 다만 정체성을 알지는 못한다는 자리로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월터의 정의론은 다른 종교와 이단들을 대상으로 책이라기보다는 현대의 무신론 진영을 겨냥한 것이라고 수도 있겠다. 월터의 의중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오늘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Is to be forgiven considered as one of inherent rights according to the worth of human nature?

용서함을 받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부여하신 인간의 내재적 권리인가? 어떤 사람들은 "Yes"라는 답변의 근거를 창세기 3장에서 찾는다. 아담의 죄에 즉각적인 죽음이 집행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내재적인 권리 때문이라 주장한다. 이것은 위험하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벌을 내리거나 정의를 구현할 없고 용서함 받는 권리에 합당한 대우를 주어야만 한다는 요상한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자칫 보편주의 이단에 빠질 우려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용서, 일흔번에 일곱번도 용서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용서 개념은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로 용서는 하나님의 인간을 대하시는 의무가 아니라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이다. 둘째는 십자가의 피묻은 용서를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원수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주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것은 의무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은 명령형의 용서를 언급하신 것이다. 용서는 정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대단히 넓의 차원의 정의가 실현되는 고차원적 방식일 뿐이. 눈에 관찰되는 자료에서 도출되는 결론이 아니며, 그렇다고 무작정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게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땅에서 모든 자들에게 실천해야 하는 정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정의는 어떤 사안에 대해 다른 모든 것들을 생략하고 눈으로 보기에만 괜찮은 일시적인 균등이 아니다. 시간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되고 정의의 주체로서 하나님과 정의의 구체적인 내용과 최종적인 정의의 집행까지 묶여진 총괄고려 없이는 정의는 인간적인 자족과 손바닥 사이즈의 안목을 달래는 개념적 최면에 불과하다.

정의를 인간의 본질이 고려되지 않는 사회의 바른질서(right order of society)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여하신 내재적 본성, 하나님의 형상이 고려되지 않고서도 정의가 실현될 있다는 차갑고 오싹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정의는 거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와 정치에 있어서 가장 첨예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경제와 정치가 구현되지 않은 시대와 장소에도 성경적 정의의 개념은 유효하다. 정의는 인간의 본원적인 권리와 관계된 것이다. 먹고 입고 자는 권리는 생리적인 것들이다. 참정권과 행복 추구권과 집회의 자유는 다분히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며 하나님과 관계된 그런 차원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들고 그것을 찾고 구하게 만드는 상황들이 다른 차원들의 권리가 거절되는 환경에서 빚어지는 섭리적인 일들이 있다. 바울이 시대의 종들에게 상전을 그리스도 예수처럼 대하라고 권면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보다 본질적인 정의가 눈과 피부에 진하게 밟히는 사회적 정의의 부재 상황에서 언급된 것이다. 불의가 시장과 재판을 장악하는 사회적 현상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지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의 죄와 역사의 종말이 고려된 권면이다.

진정한 정의는 하나님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만의 사회 속에서 구현되는 정의를 그림으로 그리면 본질이 빠지게 된다. 비록 불의의 창궐하고 악한 자들이 득세하는 부당한 현실이 사회적 질서로 자리잡는 그런 때에라도 우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근거는 정의의 주인이며 정의를 실행하는 분이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항상 살아 계시다는 것은 땅에서 한번도 엄밀한 의미의 정의가 소멸된 적이 없다는 판단의 근거이다. 칼빈이 자신의 위협적인 시대를 바라보며 관조할 있었던 것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도한 섭리의 역사를 믿음으로 붙들었기 때문이다. 앞에 잠간 안심할 만한 정의의 장면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차원의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하시고 작정하신 그런 분량의 정의가 구현될 때까지 정의의 최종적인 성취를 추구하는 자로 부름 받았음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월터는 자신의 정의론이 유신론적 관점에서 형성된 것임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론에 토대를 정의론이 되어 무신론 독자들의 손이 지문도 안찍힐 까봐 염려도 있었단. 다소 아이러니 하지만, 그가 카이퍼 사상에 심취한 철학자란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카이퍼의 사상은 우리의 신앙과 삶이 교회의 고질적인 협소성을 탈피하여 세상 전역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월터도 자신의 정의론이 교회의 경계선을 넘어 세상 지성들의 모든 담론을 총괄하고 정복하는 세계적 이론으로 자리잡기 원하여서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이지 판매부수 따위에 연연하는 작가의 조바심이 아니라는 얘기다. 

엉뚱한 의문이 생긴다. 죄와 내재적 권리와의 관계가 아직 규명되지 않았잖아~~~ 나중에 나오겠지!!! ^^

2008년 10월 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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