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일 토요일

카이퍼의 일반은총


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on th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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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초반에 화란에는 존재 자체를 복으로 생각하는 것과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기에 은총이나 은혜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물론 표면적인 문제의 핵심이 이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서로 부딪히는 갈등의 중심에는 은혜나 복의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불일치가 버티고 있다. 특별히 시킬더는 아담의 타락으로 즉각적인 죽음과 인류의 소멸이 초래되지 않은 심판의 시간적 연장을 은혜로 보지 않는다. 이후에 문화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인류의 변천사도 은혜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기독교적 요소의 부재를 꼬집어서 오히려 악하다는 인상을 드러낸다. 인류와 자연이 존재하고 발전되는 것은 시간 속에서의 자연적인 현상이지 택자와 유기자를 불문하고 빛과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Algemeene Genade)라는 용어사용 자체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문화 파괴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문화 자체보다 그것을 움직이고 활용하는 주체가 중요하다. 어두움과 죄의 영향 아래 있는 문화를 회복하는 것은 택자들의 책임이다.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는 능력으로 올바른 문화가 산출된다. 그것은 택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보편적인 명령이다. 또한 이를 복이라고 일컬을 있다고 한다. 은혜는 표현도 가능하다.

카이퍼는 조금 다른 입장이다. 택자든 유기자든 하나님이 인간 일반에게 주신 은혜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일반은혜, Algemeene Gratie (여기서 Gratie는 특별은총 표현할 때 사용하는 Gnade와 구별된다)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어떤 것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확신이 그의 일반은혜 교리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에 의해 가증하고 불법적인 문화를 이룩한 곳에서도 하나님은 통치자의 신분을 상살하지 않으신다. 음부에 자리를 깔지라도 그곳에 계신 주님을 고백한 다윗의 생각이 반영된 것일까? 확신할 없다. 카이퍼는 교회가 작은 공동체의 협소성을 탈피하고 세상 전역으로 흩어져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그곳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반영되고 결실하는 곳으로 바뀌도록 지경을 땅끝까지 넓히라고 주문한다. 가슴이 뛴다. 뛰어들고 싶다. 그러나 역사는 카이퍼의 주장을 신중하지 못한 유아적 낙관이라 평가했다

교회는 세상으로 확장되는 준비와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고 넓은 세상을 향해 열려진 문은 땅의 세속성이 교회를 마음껏 출입하고 활보하게 되는 통로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신중하자. 비록 역사적인 결과가 카이퍼의 주장을 냉소하고 있지만 그의 모든 주장을 버려야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카톨릭의 부패가 기독교의 소멸을 정당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논리처럼 말이다. 카이퍼의 주장에서 좋고 훌륭한 것은 카이퍼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성경이란 최상의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여 채택 폐기를 결정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카이퍼의 주장에서 성경적인 지지가 견고한 것은 취하고 시킬더의 장점은 살려서 기독교의 올바르고 조화로운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은 세대들의 몫이겠다. 비판하고 버리기는 쉽지만, 올바른 것을 선별하고 계승하여 보다 온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카이퍼와 스킬더의 다소 첨예한 대립을 조화시킨 인물이 있다. 바빙크다. 그를 깊이 연구하면 좋겠다. 실천적인 면에서 카이퍼에 기울어 있지만 그의 글에는 아직도 장단점을 구별하고 조율하는 노력이 역력하다.

태초에 천지와 인간을 지으시고 하나님을 복부터 주셨다. 번창하고 정복하며 다스리는 것이다. 이런 명령의 배후에는 이것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모든 자질과 성향과 능력이 고려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과 기관들은 복을 누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도록 창조가 되었으며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비롯하여 가진 모든 것을 은혜와 복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여 감사하며 모든 것을 주신 창조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기준이다. 택자나 유기자나 기준에서 생각해야 한다. 대충 중간을 설정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면 선하고 저주하면 악한 것이 아니다. 즉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괜찮거나 가치 중립적인 지점이 아니라는 말이다

2008년 10월 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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