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일 토요일

Clement의 신학과 철학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철학은 그리스 사람에게 의로움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었다.
지금 그것은 논증을 통해 믿음에 이르려는 사람에게
예비적인 훈련이 된다는 점에서 경건에 유익하다.

이런 말이 있다.
"네가 만약 선한 것이 (그리스 사람에게 속한 것이든 우리에게 속한 것이든)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면 너는 실족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들,
구약과 신약처럼 주도적인 (ton kata proegumenon)
철학과 같은 결과적인 것들(ton kata epakoluthema) 원인(aitia)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방인을 부르실 때까지
철학은 그들에게 주도적인 것으로 직접 주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히브리 인들에게 율법처럼,
헬리니즘 지성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끌어들인 선생이었다
그러므로 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사람들을 위해 길을 마련해 준비였다.

설명:
모든 좋은 것들이 위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한다. 그러나 위로부터 주어진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는 명제도 성립할 있을까? 또한 좋지 않은 모든 것들은 결코 위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명제도 가능할까이것이 클레멘트 글을 대하는 나의 관전 포인트다. 클레멘트는 철학을 좋은 것으로 분류하되 그것이 가지는 결과적인 유익 때문에 그렇게 분류했다. 그리스 지성들을 경건과 주님께로 이끄는 준비로서 좋은 역할을 했으므로 '좋은 것의 항목' 넣었다는 말이다논리의 빈약을 느낀다. 만약 철학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간주하고 버리는 사람들의 경우에, 결과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철학은 좋은 것으로 분류될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나는 철학의 기능적인 측면과 철학 자체의 존재론적 측면을 분류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철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런 구분을 가지고 다시 클레멘트 주장을 이해하면 이렇다철학이 결과적인 면에서 좋은 것이라는 것은 다분히 기능적인 판단이라 있으며, 그러나 그는 이런 기능적인 판단에서 철학의 존재론적 성격까지 좋은 것이라는 존재론적 평가로 훌쩍 넘어가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나의 판단에는 클레멘트가 기능적인 이유를 빌미로 자신의 철학에 대한 기호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자. 철학은 좋은 것인가? 그렇다면 주님께로 말미암은 것인가? 아래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진 것인가? 철학의 존재론적 측면에서 나는 위로부터 주어진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여기서 '존재론적 측면'이란 철학의 내용과 활용이 배제된 철학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철학적 요인들을 의미한다인간이 가진 철학 가능한 요인들로 산출된 철학적 내용과 활용은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야 한다. 첫째, 좋은 결과를 맺었을 경우 내용이든 활용이든 하나님의 섭리로 선하게 사용한 것이기에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있다. 둘째, 좋은 결과를 맺지 않았을 경우에는 내용이든 활용이든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산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이사야의 기록을 이해하면 좋을 같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재앙)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이사야 45 7)

어두움과 환난 또는 재앙의 창조가 풀어야 문제다. 출처가 선하면 모든 것이 선하냐는 물음 먼저 던져보자. 하나님은 선하시며 평안이든 재앙이든 모두 하나님이 행하신 것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선하다. 이런 논리적 설명이 정당한가? 어두움과 재앙 자체가 선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하나님과 관계해서 어두움과 재앙을 생각하면 그것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어두움과 재앙이 어떤 대상에게 특별한 시점에 나타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시공간적 의미 너머의 영원한 가치와 역할까지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면 그런 사안에 대한 판단은 어쩌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든다. 정말 오묘한 것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나타난 것만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 것임을 다시 절감하는 순간이다

클레멘트 주장처럼, 철학은 좋은 것이다. 주님께로 인도하는 준비이기 때문이다. 존재와 기능의 구분이 해체의 재미를 주지만 보다 바른 설명을 위한 툴인지는 모르겠다. 논의만 복잡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보다 명쾌해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의미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식은 해체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성격이 강하다는 인상을 갖는다.


2008년 10월 1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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