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일 토요일

문맥없는 세 가지 단상

1 마가복음 4장을 읽고 잠간 생각을 나누는데 어떤 분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마지막 좋은 땅을 제외한 세가지 장소가 마치 자신의 마음을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심경을 털어 놓으셨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 땅이 마치 말씀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너무도 속속들이 들추어 내고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이 네번째 ‘좋은 땅’을 가져야 한다는 권면을 위한 비유지만, 은근히 앞부분에 언급된 세 가지의 잘못된 마음의 상태를 의식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크게 두 가지의 대립된 마음의 상태를 비유의 형식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우리의 마음상태, 곰곰히 정직하게 돌아보면 좋은 땅과 거리가 먼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도대체 그 말씀이 어디에 떨어지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않고, 그냥 가볍게 생각하며 깊은 사려도 없이 청력을 발휘하는 물리적 들음에 만족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최소한 나는 그랬다. 그냥 귀에 떨어져 귀청과 부딪히는 그 이상의 들음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송이 꿀보다 더 달콤한 대상으로 말씀을 대하는 좋은 마음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설교를 듣는 시간에만 적용되는 설교듣기 지침이 아니다. 삶 속에서 늘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위엄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자의 태도를 일컫는다. 생명과 삶의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으로 말씀을 초청하는 것이 살아 숨쉬는 순간마다 의식되고 나아가 그렇게 말씀을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런 체질로 굳어지는 차원까지 연습할 필요성을 느낀다. 나에게 유익하고 즐거움을 끼치는 대상을 우리는 얼마나 극진히 영접하며 마음으로 대면하려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것보다 더 깊고 온전하고 진실하고 전인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그런 태도로 말씀을 대하면 온 존재가 통째로 떨리고 변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을까!!!

2 어떤 분(j)과 점심을 먹으면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는 말씀을 나누었다. 그런데 밤에 기도를 드리는데 그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문장은 같았지만 내용의 깊이가 달랐다. 주고 받는 주체와 대상을 나는 대체로 보이는 사람들로 생각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사실은 그렇지만 그 저변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자로 계시며 받는 분으로 계시다는 본질적인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가지고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는 말씀을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는 것은, 즉 가난한 자에게 꾸이는 것은, 그들을 지으신 자에게 꾸이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무언가를 주는 행위는 실제로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 사람을 지으신 분이 받으시는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는 것이 말씀의 핵심이다. 그래서 목마른 소자에게 주는 물 한 컵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예수님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행한대로 갚으신다. 준 대상에게 돌려받는 것을 기대하면 안된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께 드린 자가 아니라 그 가난하고 연약한 인간에게 준 것으로 간주된다. 세상 사람들도 행하는 일이다. 우리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더 큰 규모를 갖추어서 행하는 구제를 주변에서 쉽게 관찰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주는 모든 행위’에서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의식하며 베푸는 자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을 하나님 섬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가난한 자가 직접적인 수혜자로 가난에서 구제를 받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단순히 기계적인 공식처럼 가난한 자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으로 자동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는 가난한 자를 돕는 것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행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산 제사로 살게 되는 것이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는 이유는 그 주는 행위의 대상이 주님이기 때문이다. 그 갚으심이 인간의 산술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력을 따라 갚아지는 보상이기 때문에, 비교급이 아니라 오히려 최상급을 사용하여 주는 것이 ‘더’가 아니라 ‘최고로’ 복되다고 말해야 더 옳은지도 모른다.

3.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학문에 능하고 세상의 다양한 지식의 습득이 즐겁고 게다가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유발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삶의 기준처럼 부각된다. 최소한 그것을 갖추지 않으면 열등한 사람으로 쉽게 등급 매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언어에 능통하고 많은 지식을 한꺼번에 섭렵하고 취합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면 일단 다른 사람에게 대리만족 류의 환상을 일으킨다. 그 환상이 발발하면 비본질에 불필요한 의미와 해석을 부여해서 본질을 바르게 알아보지 못하는 왜곡을 일어난다. 내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사람을 흠모하는 것으로 묘한 만족이 마음에 번진다. 짜릿하다. 중독성이 발동된다. 은밀한 중에 가치관의 거래가 성사된다. 이미 나의 생각과 판단력은 중심과 균형을 잃고 동일한 환상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흠모하는 사람의 삶을 카피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이것이 몇 단계만 거치면 하나의 두툼한 계층을 형성하고 그 계층은 여론과 가치관을 주도하는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 권위가 허공에 세워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권력처럼 휘두르고 싶은 유혹이 촉수를 내민다. 여기에 타협의 손을 뻗지 않을 사람이 정말 드물다. 권력의 맛보다 더 달콤한 것은 세상에 없다는 말이 유령처럼 떠도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기준으로 작용하는 이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있느냐’는 물음은 대단히 신중한 답변을 요구한다. 가치관은 철학적 주제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고상한 철학적 용어를 옷입혔을 뿐이다. 가치의 핵심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다른 설명은 군더더기 해석일 뿐이다. 좋아하는 것이 가치를 결정하고 결국 그 좋아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창세기 15장에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란 언급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급이다. 그것도 지극히 큰 최고의 상급이 되신다. 우리가 바라고 목말라 해야 하는 궁극적인 대상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할 때에 모든 학문과 사회와 문화와 예술과 삶의 구체적인 행위들이 질서와 바른 규모를 획득한다. 다른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상급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면 모든 것이 뒤바뀐다. 나는 지금 공부를 하고 있다. 책을 읽고 번역하고 분석하고 토론하고 글을 쓴다. 이 모든 행위들은 가치의 배설물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만큼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있을 때이다. 학위를 받고 수많은 출판물을 산출하고 여러 업적을 남기는 것은 그것도 배설물일 뿐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것은 그 사람의 인생 전부를 설명하는 단문이다.

2008년 12월 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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