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일 토요일

바빙크의 De gemeene gratie 4

이제 우리의 시대에 일반은총 교리의 중요성은 분명해 졌다모든 심각한 문제들 저변에는 항상 동일한 패턴의 문제가 깔려 있다 믿음과 지식신학과 철학권위와 이성머리와 가슴기독교와 인도주의종교와 문화천상적인 소명과 지상적인 소명종교와 도덕관상적인 삶과 실천적인 안식일과 일하는 교회와 국가 등등의 관계 모든 것들과 다른 모든 물음들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창조와 재창조의 관계아버지의 사역과 아들의 사역 사이의 연관성 속에서 풀어진다자신의 지상적인 소명과 천상적인 소명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화가 감지할 때마다누구든지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도 이런 대립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하게  것이다.

그런 예민하고 복잡한 사안이 풀어지지 않은  남아 있다는 그리고  세대의 어느 누구도 온전히 조화로운 답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모든 사람과 모든 운동은 다소간 편향적인 속성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는다인생은 세속성과 현실도피 사이를 오가는 그네 위에 있다머리와 가슴은그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다이런 말이 있다모든 사람 안에는 유대적인 것과 이방적인 것이 공존하다만약 이생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롭고 편한 길을 걷고 있다면 좋은 일이다자유와 편이반율법주의 안에 이런 매혹적인 사상이 들어 있다마치 본능과 같은 의무라는 강제적인 명령 없이도 자율적인 선을 행할  있다면그것은 명령이 그어놓은 한계 내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유쾌한 일로 간주될 것이다 천재와 직관과 자발성의 자유로운 비상이 법의 족쇄에 묶여 결박을 받아야만 하는가법과 은혜자유와 권위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사이에는 어떤 연대가 있는가하지만 예술과 학문종교와 도덕 안에서 매혹적인 반율법주의를 꿈꾸던 사람이 무서운 타락을 경험하고 벌떡 일어나 환각에서 깨어나는 일들이 허다하다자연과 은혜는 모두 필요하다어느 것에 대해서도 부정과멸시가 있어서는 안된다.

 이원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느냐 상대적인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심각한 차이점이 발생한다로마 카톨릭은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다계시의 본질기독교 종교의 본질은 신비에 있다그것은 파악될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그것은 신비로 남아 있어야 한다왜냐하면 로마 카톨릭은 그것에 의해 존립이 좌우되기 때문이다바티칸 공의회는 계시의 절대적 필요성을 공포했다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무한한 선하심 속에서 인간으로 초자연적 목적 인간의 이해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천상적인 ,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마음으로 생각하여 깨닫지 못하는 (고전2:9)” 참여하는  목적을 향하도록 규정해 두셨기 때문이다로마 카톨릭의 입장에서 자연과 은총의 화해는 불가능한 일이다그러나 종교개혁 정신은  관계성을 다르게 보았고 신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은혜라는 그런 관점에서 특별 계시의 본질을 추구했다십자가의 복음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좋은 소식그것은 자연인의 파악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이해할  있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에 따르면자연을 초월하는 (supra naturam) 삼위일체성육신구속의 형이상학적 교리에 있지 않고  모든 것들의 내용인 ‘은혜(gratie)’ 있다종교 개혁자들이 신학에서 형이상학을 제거하려 했다고 생각하면 오류이다리츨이 제기한  둘의 분리는 실천적인 면에서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하지만 형이상학적 교리가  자체 안에서 또는  자체를 위하여 취해지는 경우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나 대상이   없다.

루터와 멜랑히톤 뿐만 아니라 칼빈도 역시 “하나님은 무엇인가(quid sit Deus)?” 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사색이라 하였다우리에게 중요한 것은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그의 본성에 속한 것들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그리스도의 인격은혜와 진리의 충만하심이것은 기독교에 새롭고 고유한 것이다교회의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밖에서는 어떠한 근원도 가지지 않는다이러한 것들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자연을 넘어서는 것이며(supra naturam), 자연적 비영적인 사람에겐 이성을 초월하는(supra rationem) 것들이다이교도가 몰랐고  수도 없었던 것은 우리를 향하신 ‘거룩한 축복의 확신이다어떤 인간적인 성찰도 진정한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는 우리에게 다가 오시기를 얼마나 원하고 계신지를 알아내지 못한다예수님이 죄인과 세관들을 용납해 주시는 것은 유대인을 분개하게 만들었다하나님이 죄인들을 값없이 은혜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은 공덕을 스스로 쌓을  있다고 보았던 헬라인과 로마 사람에게 어리석음 자체였다.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의 본질을 인간이 스스로는 도저히 발견할  없는 진리의 계시 안에 두었다그래서삼위일체 교리와성육신과 구속의 교리는 천상적인 복에 동참하기 위해서 최소한 ‘무조건적 믿음(fide implicita)’ 의해 받아 들여야만 하는 것이었다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는  모든 초자연적 진리들은  본질에 있어서 타락  아담에게 이미 알려진 것이며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겨진 내용의 일부이며그런 면에서 자연적인(natuurlijk) 것이며 인간의 본질에 내재된 것임을 보이고자 했다신의 삼위성도  사람 아담에게 알려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아들은 타락 이전에도 중보자로 계셨다물론 화해(verzoening) 중보자가 아니라 화합(vereeniging) 중보자로 계셨다나아가 아담과 심지어 그리스도 자신도 믿음으로 살았으며 보이는 대로 살지 않으셨다반대로개혁주의 신학자는 타락  인간이 자연에서 도출하는 어떤 종교적 윤리적 교리에도 순수하고 거짓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가르쳤다자연적 신학(theologia naturalis) 없다죄악된 인간은 자연에서 성육신과 삼위일체 교리를 도출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하나됨과 존재와 속성들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자연 안에서의 인간은 하나님을 오석하며 불의로 진리를 짓누르는 자이다(1:18).

그러므로 타락 이후에 계시는그것이 없었다면 알려지지 않았을 어떤 초자연적 진리와 인간을 연결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그것은 타락 이전의 계시에 대하여 추가나 완성이 아니다그것은 계시에 있어서 변화였다모든 종류의 초자연적 진리들에 대한 지식은 죄의 상태에서 죄악된 인간을 위해 어떤 유익을 끼쳤는가 인간은 그가 반역한  하나님이 바로 은혜의 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계시에 대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변경(wijziging) 바로 여기에 있다 원리와 출발은 바로 오직 은혜 안에서다 은혜의 원리는 인간이 특별계시 또는 자연으로부터 얻어온 모든 지식을 포괄하고 통제한다 은혜가 우리에게 삼위일체성육신구속의 교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일성과 본성과 속성들을 계시한다또한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되 그의 전지와 전능과 편재와 영원성 속에서 알도록 바르게 가르친다은혜는 인간에게 그의 근원과 목적을 알려주는 진실한 섬광을 비추어 준다은혜는 우리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지식의유일한 원리이다인간이  이전에 자연과 계시에서 가졌던 모든 지식은 구속적인 관점으로 바뀌었다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집중되며 은혜의 도움 안에서 기능한다엘로힘의 하나님은 당신을 야훼로 알려지게 하셨다화합의 중보자로 계셨던 아들은 이제 화해의 중보자가 되셨다성령은 내주하지 않는 영으로 계셨지만이제는 확신과 위로의 영이 되셨다아담 안에서도 보편적 신앙(fides generalis)으로 있었던 믿음은 이제 특별한 믿음(fides specialis),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와 칭의의 수단과 구원의 길이 되었다.

복음에 대한 적개심은 복음의 초자연적 형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것이다인간의 지성이 죄로 인하여 어두워지지 않았다면그것은 기적 자체와 아무런 충돌이 없었을 것이다기적  자체로 우리의 본성 또는 창조의 본질과 충돌되지 않는다다시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존재에 속한 이다모든 인간은 본질상 초자연주의자다무신론과 같은 자연주의는 철학의 창작물일 뿐이지인간 본성에서 어떠한 지지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종교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그는 초자연주의자다왜냐하면 초자연주의 없이는 종교도 없기 때문이다모든 신자는 어떤 종파이든 비록 머리로는 자연주의자라 할지라도 가슴은 초자연주의로 존재한다기독에서신과의 연합에서일반적인 종교에서 초자연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려 하는 자는 누구나  자신 안에 있는 고상하고 가장 좋은 것을 스스로 말소하려 하는 자이다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적인 계시에 대한 적개심은 이처럼 언제나  본질에 있어서 도덕적인 성격(zedelijk) 가진다이런 맥락에서 죄와 불신은  자체가 증오이다우매함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다(7:22). 인간에게 은혜로 구원을 받고 선물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힘과 본성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가 본래적인 계시의 단순한 개정(wijziging)이라 한다면그것은 당연히 변하기 쉬운 일시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다만 우연적인 필연일 뿐이다그것은 우연적인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으며 사물의 본질(het wezen der dingen) 속한 것이 아니었다은혜언약은 계약의 시대가 지나면 사라질 운명을 가졌다다양한 세대들이 이미 과거의 역사가 되었다율법 이전과 아래(voor en onder) 시대들에 있던 것들이 왔다가 지나갔다그러나 우리가 살고 신약 시대라고 부르는 세대도  종국이 도래할 것이다기독교 종교는 일시적인 것이다구원의 종교(Erlosungsreligion)로서 그것은 어느   소임을 완성하게  것이다은혜는 종국에 영광으로 넘어갈 것이다성경교회직분성례 모든 것들은 지상적인 은혜언약 시대를 위해서 규정된 것들이다 왕국이 충만히 이를 그리스도 예수는 그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넘겨드릴 것이다본래의 질서가 회복될 것이다그러나  질서가마치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죄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적인 은혜의 계시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자연스런 상태는 아닐 것이다그리스도는 죄가 앗아간 것보다  많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은혜는 단순히 아담이 가졌던 원시적 의의 상태(status integritatis)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지을  없고(non posse peccare) 죽을 수도 없는(non posse mori) 자로 만드신다(요일3:9, 11:25). 죄로 인하여 상실된  아담의 자리를 돌려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땅에 속하여 지상적인 존재였고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오신 주님이다우리가 지상적인 형상을 가진 것처럼 부활 이후에는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입게  것이다(고전15:45-49). 하늘에서 부를 노래는 새로운 것이지만(5:9-10), 최소한 자연과 은혜의 모든 구분이 단번에 사라지게 되는 창조의 본래적인 질서는 남아 있을 것이다이원론은 중단될 것이다은혜는 자연 밖이나 위에나 옆에 위치하지 않고  속으로 들어가 전적으로 새롭게 한다 (De genade blijft niet buiten en boven en naast de natuur staan; maar zij gaat in haar in en vernieuwt haar geheel). 이렇게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연은 최상의 계시에 도달하게  것이다우리가 하나님을 강압이나 두려움 없이 오직 사랑으로부터 우리의 참된 본성과 조화롭게자유롭고 행복하게 섬기는 그런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적 종교(religio naturalis)이다그런 종교를 회복하기 위해 믿음은 잠시동안 기독교 종교구원의 종교(religio Christiana, Erlosungsreligion) 가지는 것이다.

자연과 은혜를 연결하는 이런 식의 유기적 방법에 의해서종교개혁 정신은 카톨릭 교회의 기계적 병립과 이원론적 세계관을 원리적으로 극복했던 것이다이로써 또한 우주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되어 갔다그것은 또한 기독교 종교은혜언약이 소급하여 이르러야  일차적근원적 자연적 상태를 표상한다세계가 죄로 인하여 부패된 것은 사실이나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땅의 창조주인 아버지의 역사는 지속되고 있다자신의 뜻을 따라 하나님은 언약하신 대로 그것을 유지하며그의 일반적인 은총(gratia communis) 가지고 죄의 파괴적인 능력을 강하게 제어하고 계신다그는 음식물과 기쁨으로 사람의 마음을 채우시며 자기를 증거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냥 두지를 않으신다그는 인간에게   없는 선물과 유익을 쏟으시는 분이시다그는 가족들과인종들과 민족들을 자연스런 사랑과 애정으로 묶으신다그는 사회들과 국가들이 일어나게 하셔서 시민들이 평화와 안전 속에서 살아갈  있도록 하셨다그는 예술과 학문이 발전할  있도록 그들에게 부와 번영을 주셨다자연과 역사 속에서의 계시를 통하여 그는 그들의 마음과 양심을 묶어 비가시적초자연적 세계로 향하게 하시며그들 안에 내재된 경배와 덕을 깨우쳐 주신다.

자연과 사회의 풍요로운 삶의 온전함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때문에 가능하다그러나 그는  그런 죄악된 세계를 은혜라는 그의 특별한 행위를 통하여 계속 보존해 가셔야 했는가그는 그의 은사들을 낭비하고 계시는 것인가그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행하시고 계시는가그것은 자연적인 삶이 죄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모든 형태에 있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치가 있었기(waarde heeft in zijn oog) 때문이 아닌가? [여기서 질문해야 한다바빙크는 자연적인  자체에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그는 앞서 은혜를 강조하며 존재와 시간의 연장을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마땅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일반적인 은총이라 하지 않았는가그런데 지금 여기서 그는 자연적인  자체에 내재된 가치를 운운하고 있다모순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의미인가만약 자연적인  자체에 가치가 있었다고 보았다면 나는 바빙크에 동의하지 않는다자연적인  자체가 아무런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보존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것이  정당한 해석이 아닌가 한다바빙크는 자연적인 삶이 특별계시의비유로서 수단적 가치를 언급하는 동시에  자체를 거룩한 삶의 일환으로 규정한다가족과 혈육의 사랑,사회적 정체적 예술과 과학 모든 것들은  자체로 하나님의 신적인 즐거움의 대상(een voorwerp van zijn goddelijk welbehagen)이다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행하신 일들을 기뻐한다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만드셨고 죄와 무관하게 지금도 보존하며 유지하고 계신 본래적인 질서(oorspronkelijke ordening) 존재의 방식(wijze van zijn) 아니라 본질(wezen속에 구성하고 있다 [바빙크가 말하는oorspronkelijke ordening 정확한 의미가 궁금하다타락 이후에도 사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본질 안에 내재된 것도 당연히 부패로 물들지 않았다는 말이다바빙크는 이런 논지가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있다고 보는 것일까그렇다면 인간의 전적 타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재해석이 필요하게  것이다본질은 무엇이며본래적인 질서는  무엇인가존재의 방식과는 어떻게 구별되며그렇다면 죄의 오염은 존재의 방식에만 적용되는 것인가바빙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런 창조의 거룩한 질서를 멸시하는 것은 불법이다그것은 경험과 성경 모두에 있어서 어긋난다. [아마도 경험의 증거는 성경에 비추어진 경험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리라.] 여기서 모든 분리주의와 금욕주의의 뿌리는 근절된다모든 현실도피는 사도신경  1항의 일탈이다진실로 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다그러나  이상으로 그는 아버지의 행하신 일을 회복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을 창조시의  형상대로 회복하기 위해 오셨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심각한 속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죄는 확실히 실체(substantie) 아니라 특성(qualiteit)이며질료(materia) 아니라 형식(forma)이며사물의 본질(het vesen der dingen) 아니라 본질에 밀착된(kleeft aan) 것이며그것은 결핍(eene privatio)이며 행위적인(actuosa) 것이며 죽음과 같이 외적인 요소에서 침투된 다소 우연적인(toevallig) 것이다. [사물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는 본래적인 질서가 부패하지 않은 이유는 죄의 속성과 연결되어 있다 죄가 본질이 아니며질료가 아니며결핍에 부과한 것이기 때문에 본질에 있어서는 결코 변경이 있을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일반은총 교리와 죄론은 바빙크의 신학에서 나란히 가고 있다그럼 아담이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하여 파괴된 것은 사물의 본질에 변경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에 우연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이것이 칼빈과 만나는가성경의 지지를 얻고 있는가좀더 연구해  일이다.] 이처럼 죄는 실체에서 분리되고 또한 제거될  있다세상은 정화와 구속의 가능성 가졌고 지금도 그러하다 본질은 구조될  있고 그것의 본래적인 상태도 돌이킬  있다. [바빙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본질이 구조될  있다 것은 본질에 변경이 생겼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 아닌가 본래적인 상태라는 것은 본래적인 질서를 의미하는 것일 텐데여기서도 그는 그것이 돌이킬 필요가 있는 대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도대체 본질과 본래적인 질서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인지죄가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본질과 본래적 질서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뜻인지가 뚜렷하지 않다죄의 속성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죄는 창조된 삶의 모든 형태들을 깊게 관통하는 하나의 권능(macht)이요 원리(beginsel)이다. 그것은 세계라는 유기체를 오염되게 만들었다. [in what sense?]  죄가 그대로 있었다면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언약을 가지고 죄와 세상 사이로 들어 오셨다그는 해체하고 파괴하는 권세를 가진 죄를 일반적인 은총으로 제어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은총 충분하지 않다.

[바빙크가 이해하고 있는 일반은총의 한계그것은 강요하나 바꾸지는 못한다(zij bedwingt wel, maar verandert niet). 그것은 억제하는 기능은 가졌지만 정복하진 못한다(zij beteugelt, maar overwint niet).

불의는 언제나 그를 둘러싼 울타리를 깨부순다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거룩한 능력의 지극히 크심과 그리스도 예수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신  힘의 역사 만큼  힘을 필요로 했다(1:19-20). 세상을 건지기 위해서는  은혜의 충만함과 사랑의 전능함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어떠한 힘도 필요하지 않았다.

기독교 종교는 사물의 새로운 초자연적 질서를 창조하는 일과 무관하다그것은 로마 카톨릭이 교회에서 시도했고재새례파 교회가 뮌스터에서 수행했던 그런 전적으로 새롭고 신령한 왕국을 설립하려 하지 않는다기독교는 하나의 본질적인 이질적 요소를 창조에 주입하지 않는다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새롭게 만든다그것은 죄로 부패한 것을 회복한다정죄 당한 자를 화해하게 만들고 환자를 치료하며 상한 자를 고친다예수님은 아버지에 의해서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아 괴로움 당하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마음이 상한 자를 싸매어 주시며갇힌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결박된 자를 위하여 옥문을 여셨으며주의 은혜의 해를 광포하며애통하는 자를 위로해 주셨다(61:1-2). 그는 눈먼 자로 보게 하셨으며저는  걷게 하고문둥병 걸린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으며귀먹은 사람들로 듣게 하셨으며죽은 자를 살리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되게 하셨다(11:5). 예수는 새로운 율법 수여자가 아니셨다. 그는 정치가나철학자나법관이나예술인도 아니셨다그는 예수 구속자로 오셨다그러나 협소한 로마 카톨릭루터란또는 제세례파 관점이 아니라 온전하고 깊고 넓은 개혁주의 관점에서 전적으로 온전히 그러하신 분이셨다그리스도 예수는마치 이후의 생애가 죄로 부패하지 않아 어떠한 회복의 필요성도가지지 않은 것처럼단지 인간의 종교적 윤리적 삶을 회복하고 남은 생애를 평온하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죄가 부패하게 만든 분량만큼 확대된다그런이유로죄악되고 정죄되고 불결하고 비통으로 충만한 모든 것들은 모든 피조물이 들어야  은혜의 복음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또한 가정과 사회예술과 학문을 위한 메시지다자유주의는 그의 왕국이  세상에속하지 않았음을 선언하며 예수님의 힘과 메시지를 마음과 내면의 골방에 제한했다비록 왕국이 세상에 속하지는(van) 않았지만그것은 분명  세상 안에(in) 있으며 그것을 위하여(voor) 의도된 것이다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은 전인을 위한(voor den ganschen mensch), 지성과 의지몸과 영혼을 위한 자유와 회복의 말씀이다. [여기서 전인은 무엇인가지성과 의지와 몸과 영혼을 위한 자유와 회복은  무엇인가인간의 본성이 아예 자유롭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같은데그러면 바빙크가 주장한 본래적인 질서 사물의 본질 인간에게 있어서 어디에 해당되는 개념인가만약 그것이 전인과 다른 것이라면 인간에겐 전인 밖에 다른 보다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뜻인가바빙크의 연약한 부분이 이것이다죄가 영향력을 행사할  없었던  사물의 본질 본래적인 질서 바빙크의 생각에서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이것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으면 죄의 영향력은 모호하게 되며일반적인 은총이 보존하고 있는 내용그것이 하나님께 거룩한 즐거움을 드린다는 개념이 불투명해 지기 때문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바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사랑했다(3:16).”  말씀은 때때로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짐으로 여겨져 왔다이와 관련하여 로마 카톨릭은 자연적인 것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하나의 멍에를 만들었다이런 면에 있어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도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복음을 새로운 법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복음은 법이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그것이 주어진 것은 심판을 위하지 않고 구원을 위함이다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롭고너그럽고 풍요로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초자연적인 것이다그것은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는것이다그것은 상하게 하지 않고 치료하려 한다 은혜는 자연을 없이하지 않고 그것을 견고하게 하고 원래의 상태로 회복한다(de genade doet de natuur niet te niet, maar bevestigt haar en herstelt ze). [이는 일반적인 은총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은총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신  은혜 안에 있다면우리는 무엇보다 우리의 지상적인 소명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보여야만 한다로마 카톨릭은 최고의 기독교적 이상을자연적인 소명을 떠나 자신을 영적인 것들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수도승 안에서만 충분히 구현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기독교적 삶의 이런 개념은 우리 자신의 개신교 진영에도 깊이 침투하게 되었다하나님 앞에서 일상적인 소명을 영광스런 마음으로 수행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일상적인 직업이 원래 그런 것처럼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란다열심히 공부하고 기독교적 자세를 가지고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학생은 선량하다 말할 수는 있겠다그러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막대한 시간을 헌신하는 사람은  선량하고  고결한 자로 대우를 받는다오늘날많은 사람들의 관점에서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것을 능가하는 어떤 추가적인어떤 비범한영적인 어떤 행위를 요구한다많은 사람들을 위한  추가적인 것은 대개의 경우 단지 기독교 클럽이나 기관의 회원디렉터명예회원휴무회원실무회원많은 경우 그냥 회원이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기독교 신앙의 힘과 가치는 그가 자신의 평범한 소명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이상으로 그것을 넘어서 그가 무엇을 성취하고 있느냐를 따라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사람들은 그들이 인간이길 중단하고말과 옷차림과 관습과 취미에 있어서 평범한 사람들과 자신들이 구별될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부름 받은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고 권면했을 때에그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성도가  사람이 그의 자연적 소명을 내던지고 좁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의 일에 투신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 아니다사실 그럴 수도 있다그러나 그런 경우는 법칙이 아니라 예외이다감리교의 관점과는 달리그러한 소명의 변경은 진정한 회심의 불가피한 열매라고   없다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신  다양한 지상적 소명을 충실하게 성취하는 것이다어떤 자의적 숭배가 아니며복음을 하나의 율법으로 바꾸는 것도 아니며접촉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인간의 계명들도 아니며(고후2:21-22), 사람들의 삶과 접착(cement)되어 있는 기독교 덕들의 실천이 필요하다가정적인 절약근면정절정직질서자비이러한 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쇠퇴되어 가는 덕들이며국가와 교회와 사회적 기관들의 예외적인 단위들로 결코 대체될  없는 것들이다이러한 특성들은 특별히 칼빈주의 정신에서 자극을 받았다이로 인하여 칼빈주의는 탁월하게 되었으며사람들로 번성하게 하며 민족들이 일어나게 하였다칼빈주의는  엄격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 때문에 자연적인 것의 개혁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자체를 가정과 사회와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교회는 국가와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를 발견한다인간적인 삶의  모든 유기적 영역들은 창조에서 비롯된다그것들은 보편적인 은혜(gratia communis) 인하여 존재하며그들의 권위와 능력은 그리스도 예수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서 도출되는 것들이다그리스도 예수는 기름부음 받으셨고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진실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고모든 것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그러나가정과 국가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창조에서 직접 흘러나온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가장 엄격한 이론에 따르면모든 권세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 예수에게 또한 교황에게 직접 옮겼기 때문에정치적권세(potestas politica) 교회의 권위(potestas ecclesiae) 종속된다항론파에 따르면하나님은교회를 대표하는 국가에게 모든 권세를 넘기셨다그러나 개혁주의 원리에 따르면하나님은  주체의 고유한권세와 특별한 권위를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할당하여 주셨다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수여하신 고유한 통치권을 가지고 그것들과 나란히 거한다그러므로국가에 의한 교회의 예속과 교회에 의한 국가의 예속은 모두 비판을 받아야 한다 둘은 서로를 존중하고 지원하고 도와야 한다 사이의 어떠한 압박도 부당하다교회는 땅의 통치가 기독교적 원리들을 따라 이루어 지고 신적인 은혜의 계시에서 유익을 얻고자 한다왜냐하면 국가와 사회는 죄로 인하여 손상을 입었기에 [아마 존재의 방식에 있어서의 손상을 의미하는 것이겠다지도와 방향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은혜는 자연을 결코 멸시하지 않는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에 의해서 거듭날  있으나 그들은  본질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존재하며 경영된다그것들은 교회와 나란히 그것들의 고유한 독립성을 가진다그리스도 예수는 삶의 다양한 영역들을 파괴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회복하고 보존하러 오셨다(Christus kwam niet om de wereld en de verschillende levenskringen in haar te verderven, maar om ze te herstellen en te behouden).

이는 기독교 종교의 예술과 학문에 대한 관계성에 있어서도 동일하다그것들은 가인의 계보를 따라 먼저 발전되어 왔다인간처럼 그들은  중에 등장하고 착상된 것들이다그러나 그것들은  자체에 있어서 결코 죄악되고 불결한 것이 아니다그것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으로 깨끗하게   있다복음은 문화의  강력한 영역들에 있어서 건강과 복의 언어이다복음을 멸시하는 예술과 학문과 연구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체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는 것이며가장 풍성한 복을  자체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등진 예술은  이상을 상실하고  자체를 파괴하여 현실주의 속으로 매몰된다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학문은 불가지론에 이르며사물의 근원과 존재와 결국은 풀어질  없는 난제로 남게 된다. [난해한 구분이다예술과 학문과 연구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말씀이 지도하는 방향을 지향하지 않는 어떠한 학문도 불가지론 내지는 불가해한 난제로 남게 된다는 그의 해석은 오늘날 축적된 학문과 예술을 포함한 모든 문화는  자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가장 풍성한 복이 제거된 현실주의 뿐이라는 말인데이는 그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은총 개념과 충돌되는 것이 아닌가!하나님을 아는 그의 백성들만 일반적인 은총이 유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빙크를 오해하는 것일까?]

그러나 여기서 재창조는 창조와 다른 어떤 것이다예술과 학문은  원리를 중생과 회심의 특별한 은총이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일반은총 안에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베푸신 자연적 은사와 재능들 안에 가지고 있다. [불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진 자라는 것이 옳다면과연 그들이 산출한 예술과 학문은 하나님이 베푸신 자연적 은사와 재능들에 의해 가능할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모든 시대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방인 예술과 학문에서 유익을 얻었으며 신학자를 포함한 모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전에 대한 교육을 주장했다그들은 그러한 교육의 위험성에 어둡지 않았기에그런 교육이 기독교적 지도 아래에서 진행되길 희망했다그러나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학문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의 권리와 독립성을 주장했다. [ 말은 애매하다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학문과 예술 자체가 정결케 되었다는 것과 성령으로 인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영의 인도를 받아 예술과 학문에 종사하는 것이 동일한 것인지 서로 다른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만약 전자를 뜻하는 것이라면학문과 예술은  자체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떠함에 의존하는 속성을 가졌다고 보아야 하기에 바빙크의 입장에 동의하기 어렵다예술과 학문의 객관성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다사실  객관성은 그것을 행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객관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학문의 객관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산출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객관성을 먼저 상정해야 하며  후자의 객관성이 확보된 이후에 전자의 것을 논하는 순서로  사안을 다루어야  것이다바빙크는 지금 어떤 관점에서 예술과 학문의 독립성을 논하는 것일까예술과 학문의 독립성은 본질과 관계된 것이며예술과 학문이 기독교적 지도 아래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적용이나 기능적인 측면과 관계된 것일까기독교적 지도와 학문의 독립성지금 바빙크는 논리적인 설명의 결과로서 이것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역사적 사실을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을 따라 진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바빙크는 지금 학문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그러나 과거 개혁주의 신학자들 대부분은 그것을 알면서도 기독교적 지도 아래에서 이루어질 것을 희망했던 것은 학문의 권리를 침해하는 다소 주관적인 희망일 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설마 그렇지는 않겠지예술이나 학문을 포함한 모든 문화는사실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가 문화의 객관성 내지는 독립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것이다간략하게 말해바빙크는 죄가 본질이 아니고 결핍이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에 어떤 변경을 가하지 않았다는 죄론을 가지고 있다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면인간의 본질은 죄로 인하여 파괴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의지와 지성과 감성을바빙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본성에 포함된 것인가 아니면 본성과 관련하여 외연적인 것인가만약전자라면 그것들은 죄의 타락과 무관할 것이며만약 후자라면 죄의 타락과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문화는 인간의 본성 자체의 산물이 아니라 지정의의 활동에서 비롯된 결과의 축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만약 문화에 어떤 일말의 객관성 내지는 독립성을 논하려면지정의를 본성에 속한 것으로 여겨타락하지 않았으며 부패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 전개된다바빙크 자신도 지정의의 타락과 부패성을 이후에 언급하고 있다인간을 배제한 학문이나 문화에 대한 담론은  자체가 관념일 뿐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성경 자체는  목적에 이르는 자유를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왜냐하면 모세는 에굽의 모든 지혜를 익히며 자라났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님의 전을 애굽의 금과 은으로 장식했고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히람의 기술들을 사용했고다니엘은 갈대아의 학문으로 훈련을 받았으며동방에서  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아기의  앞에 그들이 가지고  선물들을 두었다.

학문의 하나로서 신학 자체는 일반적인 은총의 은사 밖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물론 신학은 학문들 중에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그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원리와 대상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들을 특별한 은총에서 도출한다그러나 신학이 믿음으로 거룩하게  인간의 사유하는 자의식(het denkend bewustzijn van den mensch, door het geloof geheiligd) 사용하지 않고계시로 들어가  내용을 깨닫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면그것은 학문적인 관점에서 신학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믿음으로 거듭난 사유능력,’ 그렇다바빙크는 이것을 의식하고 있었다그런데 일반인이 가진 사유의 기능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구원과 관련된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의 사유하는 기능은 특별한 은총으로 거듭나야 하지만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유익을 끼치는 일반인의 사유하는 능력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거룩함’ 없이도 일반은총 안에서 기능할  있다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반적인 은총과 특별한 은총이 함께 흘러나올 때에 신학은 그리스도의  안에  모습을 드러낼  있게 되었다. [ 언급은 위에서 언급한 번역자의 해석을 뒤집는다바빙크는 신학을 일반적인 은총과 특별한 은총의 합작으로 보고 있다그럼 믿음으로 거룩해진 인간의 사유하는 능력 이미  은총의 결합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말인가사실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이룐....]

신학은 결국 마지막 경지에 도달한 학문들과 일치한다신학의 영광은 그것이 학문의 여왕으로 다른 학문들 위에 보좌를 마련하고  위에서 홀을 휘두르는 것에 있지 않고신학적 은사들을 가지고 학문들을 섬기도록 허용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So good!!!] 신학은 다만 수종 드는 것으로써 다스린다그것은 약할  강하며 가장 낮아지려  때에 가장 위대하다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외에 어떤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을 때에 영화롭게 된다학문의 영역에서신학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gratia Dei) 해석하는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그것은 은혜를 묵상하고 은혜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우리를 둘러싼  그리고 학문에도 나타난 모든 비참들한 가운데서신학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안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 찬양한다신학은 자연과 은총 사이의 대립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대립이 화해하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통일되는  영광스런 미래를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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