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2일 월요일

신학과 철학


신앙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철학이나 이성이 차지하는 고유한 역할은 교회사의 역사 속에서 한번도 거절된 적이 없습니다. 비록 특정한 경향성을 비판하고 신적인 계시에 의해 주어진 진리의 탁월성을 표현하는 차원에서 철학이나 이성의 인간적인 한계를 지적하며 경계한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라도 여전히 이성의 활동과 철학의 충만 속에서 주장과 거절과 수용이 진행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에 철학이나 이성을 타매하는 방식으로 신앙적인 진리의 절대성을 확보하는 처신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 있어 보입니다.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에 누구도 반감을 표시할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라도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목적을 수행하는 수단이나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못하게 하는 무의식적 화법이 아닐까 라는 혐의를 털어낼 수가 없습니다.

데카르트 철학을 지나치게 신봉하며 대카르트 철학은 고대철학 이후로 마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탁월한 이라던 옥타브 하멜린(Octave Hamelin)의 과장에 대해 당시 데카르트 철학을 전공하다 중세의 가치를 발견하고 중세로 뛰어든 카톨릭 철학자 에띠엔 질송(Etienne Gilson) 저스틴 마터에서 니콜라스 쿠사까지 초대교회 당시부터 15세기까지 진행된 기독교 사상을 샅샅이 뒤지고 탐구하여 교회사의 어떤 순간에도 철학이 없었던 때는 없었다 반론을 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기독교 철학의 특성들은 이런 것입니다. 1) 철학은 신학적 문맥 속에서만 발견된다. 2) 신앙은 거룩한 계시의 영적인 진리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구한다. 3) 이성의 원리들은 믿음의 근본적인 항목에서 유래한다. 4) 이성은 계시나 신앙과 충돌하지 않는데 이는 모든 것들이 동일하신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질송이 진술한 기독교 철학의 내용들은 중세의 철학을 신학적인 맥락 속에서 탐구한 것이지만 종교개혁 정통주의 시대에도 신학이 그런 특성들과 결별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환경이 변하기 때문에 철학의 수용과 활용은 중세를 비롯한 이전 시대의 방식과 동일할 수는 없었고 약간의 변경과 발전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정통주의 시대에는 신학을 하되 늘 주변학문 전체를 의식하며 그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자세로 진리와 씨름했던 때입니다. 사실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학문 분야들 사이의 관계성을 다루는 것을 넘어 분야로 대표되는 신학과 인간이 다루는 모든 제반 학문들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관계성이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어야 것입니다. 철학을 다양한 학문들 중의 분야로 국한하는 것은 사실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인식의 한계를 따라 추구되고 있는 깔끔한 분할법의 희생물이 되는 첩경일 것입니다. 지금은 철학과 다른 것들을 구분하는 금을 긋는 방식으로 철학을 이해하는 유아적 발상의 성숙한 전환과 무엇이든 통으로 보는 사유의 필요성이 절박한 분할주의 시대 같습니다.

철학의 어원적 의미는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규정될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적인 지혜 그것에 도달하는 방식인 사랑 의미일 것인데, 성경은 지혜 일컬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당시의 질서를 움직이던 엘리트 집단이라 관원들도 몰랐던 것이며 그런 지혜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죄성 때문에 우리는 수만 있다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태도에 하나의 이념적 명분으로 옷을 입혀 하나님이 지으신 것과 이끄시는 질서까지 거부하고 훼손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비록 ‘우리 철학에 대해서는 버리고 부인하는 몸부림에 목숨이 끊어질 것까지 각오해야 되겠으나 문제의 본질인 우리의 주목하지 않고 철학 부인의 대상으로 삼아 주님의지혜 사랑하는 마땅한 도리마저 져버리는 엉뚱한 진단과 거절을 경건의 방편인 것처럼 옳다 여긴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철학을 움직이는 인간의 지성적 주체로서 이성(ratio) 지목했고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의 노른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 바르게 사용할 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철학의 특정한내용들을 거부했던 과거 선배들의 단호한 태도를 오해하여 철학 자체를 거부하면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상속하는 적통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배움에 대한 불성실의 정당화 내지는 변명일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잘못된 철학적 내용들을 신앙의 문제에 무작위로 적용하여 성경에 기록된 진리마저 무관심의 언저리로 밀어내는 오만까지 방조해야 된다는 아닙니다. 교만 공작소라 그릇된 지식의 기독교적 진리 속으로의 무례한 침투와 활보 단호히 배격하며 타협이나 용납의 흉내조차 내지 말아야 일입니다. 그런 균형점을 찾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비록 찾았다 하더라도 지점에서 머물러 있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교부들과 중세의 여러 경건한 선배들이 고수했던 것처럼 이러한 지식에 이르는 가장 우선적인 방편은 믿음이며 당연히 믿음은 이성에 선행하며(fides praecedat rationem) 동시에 이해를 추구하는 (fides quaerens intellectum)입니다. 어거스틴 표현을 빌리자면, 사실 믿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nisi et aliud esse credere, aliud intellegere). 나아가 비록 신플라톤 사상에 심취한 분이지만 에리게나(John Scotus Erigena) 같은 카롤링거 문예부흥 시대 신학자는 참된 철학이 참된 종교이고 역으로 참된 종교는 참된 철학(ueram esse philosophiam uram religionem conuersimque ueram religionem esse ueram philosophiam)’이란 말까지 했습니다. 다시 어거스틴 입장을 살펴보, 사물을 규정하고 구분하고 배열하는 실질적인 학문(scientia realis) 사람의 이성에서 고안된 부산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성의 본성 자체에 내재된 원리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문 자체에 대한 물음과 거절보다 학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바른 방법론에 관심을 쏟습니다. 그리고는 사물의 실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이 포함되는(complectendum) 경우나  실체에 포함되어 있는 어떤 것이 생략되는(praetereundum) 경우에는 추론적인 진리가 오류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창조자의 의도가 가감되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최상의 방법임을 강조한 셈입니다.

안셀름은 진리를 절대적인 지고의 진리(summa veritas), 사물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진리(veritas in rerum existentia) 사유의 진리와 명제적 진리(veritas cogitationis et veritas in propositione)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있는 진리의 근원(causa)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일컫는 것이고 사유와 명제의 진리는 그것의 결과라는 인과적 관계성을 논합니다. 그는 또다시 이성으로 이해된 진리 혹은 관찰에서 지각되는 진리와 마음 자체에서 포착되는(sola mente percipi) 진리로 구분하고, 눈으로 관찰된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 포착될 있는 올바름(rectitudo) 바로 진리라고 말합니다. 물론 안셀름도 인간의 마음이나 이성이나 오관 주도적인 인식론 이전에 믿음의 전제를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도 이방인을 설득하여 믿음을 갇도록 목적으로 순수한 이성의 작용만을 사용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시도가 아닙니다. 안셀름이 살던 시대에 기독교는 상식이며 같은 생각과 가치를 공유하며 교류하던 동료들의 공동체로 수도원에 그가 머물러 있었다는 정황을 조금만 고려해 본다면 그의 신존재 증명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일환임을 쉽게 확인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안셀름도 비록 중세에 내노라 지성인의 사람으로 학문적 역량을 왕성하게 발휘한 분이고 기독교 철학의 명맥을 이어간 거인들의 대열에 포함되는 분이지만 인간이 가진 이성이 피조된 것이며 창조자가 그렇게 설정해 이성의 한계를 몰랐거나 부인했던 분은 아닙니다. 그는 이성의 작용을 마음 자체에 대한 것과 물리적인 사물에 대한 것으로 구분한 마치 순수이성 문제를 선험적 가상의 오류로 풀어낸 칸트의 사상을 과거에 평범하게 주장되어 상식의 카피에 불과한 것처럼 만드는 논지를 펼칩니다. 이성적인 마음(mens rationalis) 자체에 대한 사유를 통하여(seipsam cogitando) 스스로를 이해하려 때에 이성의 작용을 통하여 그것의 유사물(similitudinem) 혹은 그것에 대한 인상(impressione) 따라 자체의 이미지(imaginem ipsius) 형성되는 것이며, 이성적 활동이 없었다면 마음과 마음의 이미지는 분리될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꼬집어서 말합니다. 그는 또한 마음이 물리적인 사물을 생각할 때에도 이성으로 인해 사물 자체가 아닌 어떤 (aliud quod ipsa non est) 지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실제적인 사물과 그것의 유사물 사이를 어떻게 구분할 있는지 방법을 모른다는 것에 있답니다. 창조된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그것들이 인간의 지식에 존재하는 방식과 대단히 다른데(multo aliter) 말입니다.

어거스틴 안셀름이 말하는 인간의 이성 혹은 학문은 아직 죄의 개입을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창조된 인간성 자체가 가진 한계를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면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눈을 가지고 만물의 객관적 실체를 보도록 창조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을 믿고 수용하여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그대로 보는 그런 방식으로 진리를 인식하는 장치가 인간의 본성에 내장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지식의 본질은 진리 자체시며 모든 진리의 근원이며 그의 안에서만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떠나면 지식은 교만의 화신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부터 조성하신 지식의 하나님 의존성을 버리면, 결국 본질을 이탈하고 스스로를 본질의 본좌에 앉히면서 참된 본질을 밀어내는 교만의 광기는 제어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본성 전체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성이나 지식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전방위적 독립성은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은 물론이고 학문의 영역들도 영향권 안에 있으며 심지어 신학을 공부하는 와중에서 발휘되어 기록된 성경의 진리를 인간화된 진리로 대체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버려야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이성의 활동이 아닙니다. 학문과 지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학을 버려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마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 도전장을 내밀 하나님을 떠나서도 얼마든지 있고 생각할 있고 이해할 있고 결정할 있다고 판단하는 인간의 방자한 자존성 옹고집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버리면 세상에는 정말 버릴 것이 하나도 없고 불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고 무익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것입니다. 진정한 지식의 세계로 진입할 있습니다. 참된 학문과 참된 철학이 창조적 질서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란 사실에 대해서도 감격과 찬동의 탄성을 지르게 것입니다.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필요한 것이며 유용한 것이며 즐거운 것입니다. 모든 학문적 역량의 최대치를 발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과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은  헤아릴 없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일평생 배움의 길을 접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측량할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  심장의 박동과도 같은 철학의 왕성한 본성을 잠잠케 없었던 탓입니다.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분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만드신 만물과 행하신 일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진리 한 조각이라 할지라도, 이를 얻기 위해 만물과 역사 전체를 뒤집어 털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탐구의 길을 접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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