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일 토요일

De civitate Dei 읽다가...

어거스틴, 정말 신학과 경건의 샘이다. 무한한 영감을 그의 글에서 뽑아낼 수 있다. De Civitate Dei는 정말 걸작이다. 모든 장르가 그 안에 종합되어 있다. 성경의 각 구절들은 하나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천 개의 얼굴을 가진 것처럼 그의 글도 종합적인 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고 본다. 교리적인 그의 입장을 탐구할 목적으로 그의 책들을 펼쳐서 그의 문체를 있는 그대로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거스틴, 교리적인 엄밀함도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가 가진 글의 풍부한 의미와 내용들을 깊이 음미하는 독서의 기회를 마련하면 좋겠다. 나도 그런 글들을 산출할 수 있도록… 그가 신국론을 쓴 배경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번째 근본적인 동기는, 로마가 패망한 원인이 기독교에 있다는 주장 때문이다. 이것을 근본적인 동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책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100년이 지난 410년, 로마는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기독교가 그 동안 로마에 선사한 것이 무엇인가? 당연히 이런 물음들이 쏟아졌다. 급기야 기독교를 로마가 쇠퇴하게 된 원인으로 지목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억측을 잠잠히 묵과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동기는, 기독교 즉 하나님의 왕국을 로마 제국으로 혼동하는 무리들의 그릇된 주장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를 하나님의 나라로 일치시켜 로마의 멸망은 곧 하나님 나라의 멸망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에 하나님의 나라와 땅의 나라를 구별하고 그 개념을 명확하게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붓을 들었다는 것이 또한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가 언급하는 하나님 도성의 첫번째 특징은 겸손(humilitas)이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는 하나님은 그 도성의 왕이시며 설립자다. 그 도성이 운영되는 최고의 신령한 법규정(sententiam divinae legis)은 바로 성경에 있다고 천명한다. 그 나라는 물리적 지리적 공간적 시간적 단위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과 땅의 도성이 어떠한 원리에 의해 분리되며, 그것을 분리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분리의 원리에 대한 어거스틴 입장은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나누어진 택자와 유기자의 분리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도성을 구성하는 멤버이며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영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그러나 후자는 인간의 법을 기준으로 육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후자는 몸이나 마음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전자는 하나님을 즐기는 삶을 추구한다. 이런 차원에서 최고선을 인간의 마음에 두는 스토아 철학이나 최고선을 육체의 늘거움 속에서 찾으려 했던 에피큐로스 철학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정죄한다. 그리고 땅의 도성은 자아를 따라 살며 자아를 위하여 만든 우상을 숭배하나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을 따라 살며 참되신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는 곳이다. 두 도성을 구분하는 이런 기준들을 보면, 하나님의 도성은 하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땅에도 있음을 깨닫는다. 단순히 영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도 존재한다. 땅의 도성도 로마 제국이나 단순히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이루어진 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두 도성의 구분은 시공간적 구분이 아니라 원리적 구분이다.

어거스틴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두 도성의 분리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라고 보았다. 인간의 타락에서 나타난 첫번째 그러나 근원적인 부패성은 자기애(amor sui)가 인간을 주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산다는 것은 단순히 중립적인 삶의 일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가 없다면 인간은 죄 이외에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없다고 그는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 원죄는 개인적 사회적 존재를 이해하는 지배적인 요소였다. 이 원죄의 개념에 기초하여, 그는 정부를 권력과 범죄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겼다. 이런 맥락만을 제한해서 보면, Augustine에게는 일반적인 은총의 개념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그것을 적극 인정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선한 것과 악한 것들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 되게 하셨다(bona et mala utrisque voluit esse communia).” 이러한 어거스틴 생각이 어떻게 칼빈을 거쳐 바빙크와 카이퍼의 일반은총 교리까지 이어지게 되었는지 추척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르게 알고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배우고자 함이다.

신국론을 읽으면서 어거스틴의 번뜩이는 통찰력이 있어 몇 가지 소개한다.

1. 참으로 중요한 것은 행운이라 여겨지는 것과 불운이라 불리는 것들의 사용(usus earum rerum)이다. 하나님은 행운과 불운의 분배에 있어서도 역사하는 분으로 당신을 이렇게 보이셨다. 만약 모든 죄가 저질러질 때마다 분명한 형벌이 따른다면 마지막 심판까지 남아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죄가 신적인 간섭으로 도무지 처벌되지 않는다면 신적인 섭리는 없다고 믿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에게 당신의 부요함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가 기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것을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수고에 대한 정당한 보상(praemia)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3. 동일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독특한 이질성(dissimilitudo)이 있다: 그들이 동일한 고통을 겪지만 미덕과 악덕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불 속에서도 황금은 빛나고 지프라기는 태워 없어진다; 동일한 도리깨 밑에서도 알곡은 남고 쭉정이는 날아간다; 하나요 동일한 힘이 선인과 악인에게 떨어질 때, 전자는 순화되고 정제되나 후자는 정죄되고 파멸된다; 동일한 환난 속에서도 악인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저주하나 선인은 그에게 기도하며 그를 찬양한다.

4.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 있다. 물질적인 피해가 두려워 어떤 사람을 책망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썩어 없어지는 땅의 것을 탐하다가 그런 탐닉이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잠식하여 초래되는 고통과 손실을 생각하면 지극히 어리석은 것이다. 분실에서 오는 피해보다 그것을 사랑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마땅히 입술을 열어 직언해야 할 상황에서 물질적 피해가 두려워 침묵하는 것은 참으로 부당한 비겁이다. 꾸짖어야 할 때 꾸짖어야 한다. “그는 죄 중에 죽을 것이지만 그 피 값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했다. 마땅한 도리의 실천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 없도록 하나님의 도성에 늘 소망을 두어야 한다. 좀과 도둑이 없는 곳에 네 보물을 쌓아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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