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0일 월요일

칼빈의 종말론

의인이 죽으면 어케 되나?

개인적 종말론 즉 죽음 이후의 영혼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그가 처음으로 1534년에 저술한 신학적 문헌으로 Psychopannychia에 잘 나타난다. 무엇보다 Psychopannychia는 책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죽음과 몸의 부활 사이에 인간이 가진 중간적인 상태를 ‘영혼의 각성’으로 보는 입장을 영혼 불멸설과 더불어 설명한 책이며 이러한 영혼 각성설은 기독교 강요 안에서도 거의 바뀌지 않는다. 이 책의 저술 동기는 칼빈 시대에 재세례파 및 열광주의 분파들이 주장하는 영혼 수면설를 진압하기 위함이다. 이 책에서 칼빈은 먼저 죽음에 대한 묵상이 죽음에 대한 이방인의 음울한 태도와는 다르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죽음은 멸절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여러 유력한 교부들의 입장을 따라 칼빈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실화적인 상징으로 보고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을 안식(puietem) 누리는 상태로 이해한다. 이 안식은 성경이 말하는 ‘잠’의 본질인데, 나태(desidiam)나 무감각의 병적인 상태(ueternum) 혹은 취기에 빠져 골아 떨어진 어떤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항상 믿음을 수반하는 양심의 평온과 안정(conscientiae tranquillitatem et securitatem)을 뜻하는데 이런 평온과 안정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nisi post mortem) 결코 완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언급 이후에 칼빈은 죽음 이후의 영혼이 무의식 및 무감각의 수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누린다는 자신의 논지 지원하는 여러 성경적 근거들을 제시한다.

불신자의 죽음 상태를 생각하면 칼빈의 입장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불신자의 죽음은 ‘영혼의 수면’ 상태가 아니라 히브리서 10장 27절이 말하는 것처럼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아마도 중간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 같음)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아마도 마지막 심판에서 이루어질 일이 아닌가 싶다)만 있으리라’ 같은 상태다. 여기에 빗대어 의인의 죽음을 생각하면 의인의 죽음은 영혼의 무감각한 수면이 아니라 아브라함 품에 안긴 듯한 평강과 안식을 누리는 의식적인 상태라는 것이 쉽게 납득된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저자(바울?)는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에 대해 논하면서 하나님과 어린 양과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의인들 등등이 우리에게 허다한 증인으로 있다는 논지를 펼친다. 이분들이 다들 주무시는 무감각 상태에 있다고 보기에는 곤란한 구절이다. 사실 십자가에 나란히 매달린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그것을 '잠자리' 같이 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잖아. 최근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논쟁이 후끈 달아 오르고 있는데 과거에도 늘 있었던 논쟁인데 옷만 갈아입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양한 입장을 접하면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되고 포용력도 커진다는 유익이 없지는 않지만 믿음이 연약하신 분들에겐 그런 다양성에 대한 노출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링크된 Psychopannychia는 1545년 판본이다. (보기에는 컬러지만 다운로드 받으면 흑백으로 돌아간다.) 1536년 서문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공공연히 공격을 받는다면 진리의 극미한 조각도 뜯겨지지 않도록 어떠한 식으로도 참아서는 안된다(quum ex professo tentatur Dei veritas, nullo modo ferendum esse, ne tantillum quidem ex ea delibari)'는 젊은 칼빈의 비장한 결의가 타오른다. 겨우 약관의 중턱에 오른 칼빈의 언사지만 가볍지가 않다. 불혹의 어깨가 버거울 정도로...ㅡ.ㅡ

Psychopannychia 라틴어판 (1545)
Psychopannychia 불어판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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