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6일 일요일

교육적 목적의 예수님 그림은 우상인가?

16/17세기 개혁주의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가시적인 그림을 그려 하나님을 표상하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델 문답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칼빈의 경우에도 당시 교황주의 학자들이 카톨릭의 성상숭배 가시적인 요소를 사용한 신비주의 행태가 교육적 차원에서 정당화될 있다고 한 입장을 반박하며 그 이유로서 2계명 해석을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어떠한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는 자체와 2) 그것을 자기의 신앙적인 유익을 위해 경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상을 만드는 행위 자체와 그것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모두가 부패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탁월하게 우상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지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떠한 형상도 합당할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가시적인 그림 혹은 형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모든 사람들은 참된 경건의 훈련에서 쇠퇴할 뿐만 아니라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불의 형태로 모세에게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긴 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불가해한 것이며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우상 제작하는 것을 방지하게 되었다고 칼빈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개혁주의 교회는 이런 16/17세기 개혁주의 인물들의 엄밀한 입장과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주일학교 대부분이 예수님 얼굴과 모습을 그리고 어떤 경우는 진흙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칼빈 신학교의 교단인 북미 개혁교회CRC 그런 흐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교육받지 못한 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수단적인 방편으로 그림이나 쉬운말 성경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지를 생각할 있습니다. 1) 이들은 신앙 선배들의 엄밀한 입장에서 분명히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나 그림이나 조각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경의를 표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 언어는 그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된 성경자체를 하나님의 임재처럼 신령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문자는 그림이 역사 속에서 고도로 추상화된 결과이며 문자를 사용하며 우리는 머리에 시상을 떠올리고 어떤 그림을 그립니다. 언어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머리 속에서는 어떤 형상을 그려지는 것이지요. 인간의 성정이 지닌 한계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이 그런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아주 엄밀한 잣대로 평가해 , 머리 속에 그려진 그림이나 시상을 신념으로 붙든다면, 음란한 생각만 해도 간음인 것처럼 우리는 우상에 빠지는 셈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머리에 그려진 하나님 지식과 형상과 행위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하나님을 문자로 설명하고 뜻을 해설하고 말하거나 책으로 출판하는 방식은 가시적인 그림과는 단절적인 느낌을 주는 높은 차원의 추상화를 활용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이 지각하고 인식하고 표상함에 있어서 본질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논리와 지혜와 지성을 동원하여 깨달은 깨달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담아내지 못하면서 혹은 다른 구절들의 의미까지 희생하는 경지까지 옹호하는 교리적 혹은 교조적 고집과 천착이 오히려 심각한 우상숭배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자나 사색을 활용했다 해서 우상숭배 조항에서 면죄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섬기고 바르게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의 얄퍅한 지각이 덤빌 있는 영역이라 판단되면 그것에 달려들어 정죄의 칼을 세우는 행위는 비겁한 것이고 교회에도 아무런 도움이 안되면 그런 저항 자체가 하나님께 경배의 내용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비진리에 저항하고 논박하고 상대방을 설득할 때에는 그런 행위조차 경배의 일부가 되도록 함이 중요한 같습니다. 경박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무례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정죄나 비판을 자신의 경건을 세우고 자신의 신앙의 깊이를 입증하는 방편으로 삼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 20절을 생각해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능력을 분명히 보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자연 묵상하는 중에 깨닫고 시로 노래한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하늘과 땅을 보지 않고 사람과 동물과 형설할 없이 다양하고 복잡하되 조화로운 창조를 보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일반은총 영역이 생략된 특별계시 강조는 고도의 우상숭배 행위일 있습니다. 인간은 인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을 말로나 글로나 느낌으로 번역할 없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학문이나 과학은 하나님이 당신의 신성과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만드신 만물을 어떻게든 첨삭을 가하는 방식으로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파괴하고 변질되게 만드는 행위가 것입니다. 책에 예수님의 얼굴 그렸다고 문제를 삼는다면 인간은 언어 사용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고 어떤 식의 표상도 피조물과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들도 삼가해야 하고 그냥 모든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부분과 고려해야 부분까지 싸잡아서 무시해야 한다는 아닙니다.

언어와 그림 혹은 형상은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원래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 문자의 형태를 활용하신 신적인 섭리의 의미를 간과할 정도로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런 방식이 인간의 부패한 종교성을 잠잠케 하고 우상화의 빌미를 최대한 제공하지 않는 최상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같습니다. 내가 배움이 있고 지각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우상숭배 단계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저마다 지각이나 재능이나 믿음의 분량이 다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을 고려하되 정도의 차이를 여전히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조항이 들어있고 소자들에 대한 배려를 간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그림으로 신약과 구약을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있도록 돕는 행위를 비판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분들의 선한 의도를 아니까요. 그리고 그림만 단독으로 교육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한계와 유익을 설명하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하나의 일시적인 수단으로 그런 방편이 있다는 가르침이 수반되는 것이라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면에서는 수만 있다면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형태로도 보존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속의 그림보다 부모나 선생이 자녀나 제자에게 인격과 삶이라는 그림으로 하나님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증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 전달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이지만 가장 성경적인 방식 아닌가 싶습니다.

정리하면, 1) 그림과 문자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차이나지 않는다. 2) 그렇다고 구분의 섭리적인 의미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3) 올바른 지도와 가르침이 수반되면 책의 그림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그리 문제될 없다. 4) 자신은 성경의 문자적 형태를 보존하고 우리의 인격과 삶이라는 그림으로 하나님을 보이고 가르치는 방식을 선호한다. 5)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교육적인 목적에 있어서도 그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6) 현재 개혁주의 교회들은 그런 엄밀한 입장을 대부분 따르지 않고 있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왜곡할 정도의 우상숭배 증상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8)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가 결의한 것처럼 본질과 기본에 집중하고 부수적인 것은 허용하는 것이 좋다. 이상입니다...조금 길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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