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6일 목요일

Samuel Rutherford의 Disputatio Scholastica de divina providentia

사무엘 러더포드 시대는 보행자와 경주하는 평안의 시대가 아니었다. 진리의 인간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득세하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자들은 매몰찬 투옥과 비판의 뭇매를 감수해야 하는 시대였다. 현대 학자들의 러더포드 평가는 쌍극을 달린다. 나는 그를 말탄자와 경주해야 하는 시대에 하나님이 진리의 예리한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각별히 준비하신 인물로 해석한다. 링크된 책은 하나님의 섭리를 면도날 움직이듯 날카롭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논박한 책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외치지만 자의적 해석으로 덧입혀진 개념으로 만족하고 모양만 성경에 충실한 것처럼 꾸미는 경우가 허다하다. 러더포드는 성경적인 언어에 '자기 멋대로' 개념 담아내는 것을 단호히 거절한다. 이 책에서 읽히는 거칠고 긴박한 시대상에 걸맞은 그의 직선적인 언어는 비수처럼 원수들의 급소를 찔렀고 단순히 격파하고 소멸하는 태도만이 아니라 진리의 섬광을 그들에게 비추어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암시적인 용납의 태도도 희미하게 읽힌다. 복음의 본질을 개혁주의 시각에서 묘사할 때에는 건조함이 아니라 생동감이 번뜩이며 심오하고 직관적인 명문장에 담아내는 언어의 연금술사 면모까지 유감없이 발휘된다. 링크된 책 때문에 러더포드는 트위스와 함께 소시니안 신학의 앞잡이로 내몰리는 공격과 수모도 당하였다. 그러나 비록 여기에 동의하는 분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갈등을 빌미로 등을 돌리기엔 그들이 가진 진리의 엄밀성이 너무도 고귀하다. 

사실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엄밀성은 타협할 수 없다.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예리함을 추구해야 하고 극도의 정확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성경은 비록 그렇게 추구하는 방향과 정도에 있어서는 결코 딴지거는 일이 없지만 그 추구의 방법에 있어서는 표정을 완전히 바꾸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즉 '사랑을 따라' 구하란다. 진리는 방향이고 방법은 사랑이다. 절묘하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계시된 그대로 수용하되 일체의 가감이 없어야 함에는 어떠한 타협도 불가하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함에 있어서 성경이 제시한 방법론을 이탈할 때에는 하나님을 향하던 그 방향은 곧장 자신으로 돌이킨다. 너무도 삽시간에 일어나는 일이어서 스스로도 속는 대목이다. 사랑이란 방법론을 취하지 않고서도 진리가 추구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본인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어림도 엄따. 아무리 무지해도 사악한 이리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사랑이다. 지극히 고상한 지적 언술로 세계와 역사를 두루두루 넘나들며 신학과 성경에 대한 기가막힌 썰을 풀어내는 자라도 그에게서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면 백발백중 삯꾼이다. 사랑과 진리가 입맞추는 십자가의 도는 가장 엄밀한 진리를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추구하는 유일한 길 되시겠다. 그래서 최고의 신학자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 외에는 알지도 자랑치도 않겠다고 선언했던 거다. 

러더포드 Disputatio scholastica de divina providentia (Edingurgh,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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