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8일 화요일

성경과 전통

‘성경과 전통’ 문제는 교회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로서 과거의 해묵은 담론이 아니라 지금도 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회복의 방향을 제시할 중차대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를 연구하는 분들은 16세기 논쟁의 핵심을 종교개혁 원리로서 ‘오직 성경’과 반동 종교개혁 원리로서 ‘성경과 전통’ 사이에 벌어진 원리의 충돌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슈는 어거스틴 및 루터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에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보편적 교회가 나를 움직이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Evangelio non crederem, nisi me catholicae Ecclesiae commoveret auctoritas)’고 선언했고, 루터는 ‘성경의 증언들 혹은 명백한 근거에 의해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Nisi convictus fuero testimoniis scripturarum aut ratione evidente) ... [오류와 모순으로 가득한 교황과 공회들을 믿지 않는다는 거부의 입장들 중] 어떠한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고 싶지도 않은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양심(capta conscientia in verbis dei)에 저촉되는 일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편적 교회의 권위를 성경보다 우위에 두려는 얄팍한 술수의 정당성을 어거스틴 선언에서 찾고 있으며, ‘오직 성경’이란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구호를 앞세워 주께서 섭리하신 교회의 긴 역사와 전통이란 교훈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종교적 유아독존 망상의 든든한 근거로서 루터의 격한 언사를 동원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상식의 하한선도 허무는 이 두 극단의 지칠 줄 모르는 되물림은 지금도 교회의 기둥을 붙들고 있다고 착각하는 적잖은 종교 ‘정치가’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전통의 올바른 개념과 관계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교회 자체의 개혁도 절망의 벼랑으로 몰아가게 될 것이며, 개인과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무수한 이단들의 고삐 풀린 광란도 잠재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네델란드 출신의 종교개혁 신학자요 역사가인 오버만(Heiko Oberman)은 전통을 둘로 나누는데, 첫번째 개념의 전통은 ‘성경 교사들과 교회 사이의 줄기찬 논의를 통해 성경의 내용들을 성도들의 삶으로 운반하는 성경의 기구적인 수레(the instrumental vehicle of Scripture)’이고, 두번째 개념의 전통은 ‘성경에 배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감독들의 계승을 통하여 전하여진 성경 밖에서의 사도적 전통 속에도 범람하고 있다는 신적인 진리의 권위적인 수레(the authoritative vehicle of Scripture)’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분을 가지고 오버만은 종교개혁 인물들과 그들의 중세적 선행자들 모두가 전통을 그 자체로 거부하진 않았으며 다만 성경의 해석 면에서의 교회적 전통이든 성경의 기록 밖으로 전수된 사도적 전통이든 그 어떠한 전통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제2의 소스로 간주되는 것은 도무지 용납하려 하질 않았다고 말합니다.

전통 연구에 있어서 오버만의 동시대 전문가인 콘가르(Yves Congar)도 루터가 전통에 대한 성경의 절대적인 우월성을 외치는 한 교회의 ‘전적으로 보편적인(completely catholic)’ 학자라고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 이후에 마틴 켐니츠(Martin Cemnitz)와 같은 루터란 정통주의 학자가 전통을 7가지 종류 즉 1) 예수님과 사도들의 메시지 전체, 2) 성경의 전달, 3) 초대교회 시대의 신조, 4) 사도적 주해, 5) 성경에서 취한 교리들, 6) 교부들의 공통된 견해, 7) 고전적인 예전 등을 성경적인 것 혹은 성경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긴 것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바르트의 견해에 귀동냥을 한 듯한 입장을 펼치는데, 정통주의 시대는 대부분의 개신교 학자들이 종교개혁 정신을 이탈하여 성령의 내적인 조명도 거부하고 성경‘책’만 강조하는 ‘책의 종교(religion of the book)’로 전락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비록 콘가르의 뽀족한 지적을 피해갈 수 없는 분들이 일부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입장은 중세의 건강한 학자들과 종교개혁 인물들의 전통적인 견해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떠한 종류의 전통과도 권위에 있어서는 결코 비교될 수 없다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대해 반석 같이 견고한 입장을 취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저자요 최고의 해석자인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무시한 것은 아니며 동시에 성경에 부합한 전통을 존중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역사에 출연했던 진리의 발자취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최고의 전통을 찾아내려 했습니다. 즉 교회의 진정한 보편성과 정통성의 계보를 누가 이어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밝히고자 가용한 모든 전통적 자료들을 다 수집하고 샅샅히 탐구하고 각 교부들의 최대 장점들을 다 축출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터와 기둥이란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그 진리의 굵은 줄기를 붙들고자 긴 역사의 두터운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발굴하고 또 발굴하려 했던 시대가 바로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에 큰 별처럼 진리의 빛을 환하게 비춘 믿음의 거인들이 남긴 글들을 읽어 보십시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최첨단 문명의 이기를 누리되 물고기가 물을 모를 정도로 친숙해진 우리가 그런 문명의 혜택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동떨어진 미개발 시대를 산 그들이 얼마나 깊고 거대하고 장구한 사유의 세계를 얼마나 정교하게 더듬었고 표상해 냈는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망원경과 현미경을 통해 해체하고 확대하는 기술의 발달이 과거에는 없었다는 희귀성을 이유로 거기에 과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과거의 역사와 전통에 무례한 콧방귀 신공을 구사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도 들면서 때로는 너무 가볍고 천박하단 느낌에 휩싸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이단들이 자신을 정죄할 껄끄러운 잣대 제거할 요량으로 지난 역사와 전통의 가치가 이제는 낧아서 지금의 '새술'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새부대가 필요함을 역설하곤 한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주장이 과거에도 있었던 전혀 새롭지 않은 이단성 짙은 주장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불쾌함이 견딜 수 없는 것이지요. 전통에는 나쁘고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제거하고 극복해야 할 악습도 있지만 따르고 계승해야 할 좋은 전통도 많습니다. 주로 하나님의 의와 나라보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자 할 때에는 악습이 보다 유용하기 때문에 엉뚱한 전통의 계승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 더러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왠만한 기능을 기술이 다 대신하여 인간이 직접 나서서 관여할 영역이 극도로 축소된 현대와는 달리 과거에는 대부분의 기능을 인간 스스로가 감당해야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이 맨살을 드러내듯 더 현저하게 드러내는 과거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역사의 교훈을 왜 남겨 두셨는지 그 이유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혹 차이가 있다면, 아담 시대에는 치마로 치부를 가렸지만 지금은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문화로 보다 은밀하게 가릴 수 있는 정도의 외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사실 양심도 고발의 증거를 찾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숨을 수 있는 얼마나 다양하고 기발한 방편을 제공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들키지 않도록 잘 은폐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방법을 알려 주면 우리는 거기에 아무리 큰 희생이 수반된다 할지라도 지불할 용의가 되어 있는데, 이러한 현상에서 인간의 타락과 숨고자 하는 죄의 본성을 직시하고 극복의 노력을 시도하는 경우는 대단히 희박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숨고 즐기는데 바빠서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절대적인 권위가 무너지면 교회에는 어떠한 질서도 세워질 수 없습니다. 인정을 봐 주고 적당히 넘어가는 인간적인 ‘지혜’와 처세술을 구사하고 체득하고 물려주고 그런 악순환이 굳어진 반복의 사슬을 ‘당연한 질서’로 여기면서 오히려 여기에 비판의 날을 세우거나 반론의 그림자만 보여도 교회를 허무는 자라고 낙인을 찍어 그 바닦에서 살아남지 못하도록 축출되는, 질서의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대적하는 구조악이 교회의 등뼈에 박혀 부패의 악취를 풍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정직하고 겸손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선 자리가 얼마나 깊은 타락의 수렁에 빠져 있는지를 그나마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은 교회의 전통을 살펴보는 일일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진리의 엄밀성을 어디까지 추구했고, 복음을 따르되 얼마나 고매한 인격과 치열한 삶으로 몸부림을 쳤는지, 캄캄함이 덮힌 세상을 밝히되 얼마나 다양하고 광범위한 차원까지 세상의 빛으로 살았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일에 어떠한 것까지도 희생의 대상으로 포기할 수 있었는지, 천국의 이정표가 되어야 할 교회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 배움의 삶을 살았는지 종횡으로 살펴볼 수 있는 소스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통인 것입니다. 우리는 임의로 시대를 구분하고 선악과 우열의 딱지를 붙이지만 만물과 역사의 통치자요 주인으로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신 적도 없으시며 분초마다 살피시고 세상의 먼지 하나라도 돌보시지 않음이 없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함과 광대함과 섬세함과 인자와 긍휼의 발자국이 실재로 찍힌 그런 교회의 전통을 모든 시대에 걸쳐서 수집하고 탐구하는 것은 물론 진리에 있어서의 가감은 없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기록으로 주신 계시의 진리를 입체감 있게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편이 있다면 아마도 전통일 것입니다.

전통을 버리면 하나님의 역사도 버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부요함도 많이 놓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현주소를 객관적인 눈으로 직시할 수 있는 장치를 제거하여 지금 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를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선배들의 확인된 교훈도 없이 불명확한 오류답습 및 시행착오 가능성에 문을 활짝 여는 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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