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7일 화요일

Semi-Ramism의 등장

라미즘은 정적인 방법론과 사상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했다.
특별히 아리스토 철학과의 절충은 방법론적 차원과 정치적인 차원 모두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제이콥 쉐크(Jakob Schegk)는 독일의 지도급 아리스토 학자였고 라미즘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웠던 인물이다. 그런 스승의 영향 아래에서 피스카토르는 차음에 라미즘에 적대적인 성향으로 무장된 체 튜빙겐을 떠났다. 이후에 그는 올레비아누스와 뢰딩(Rhoding)의 설득을 받아 라무스 논리학을 주의깊게 읽기 시작했다. 1580년에 그가 출판한 첫번째 저술에서 라무스의 논리학에 대한 비판 때문에 페리 밀러는 그를 반라무스 인물로 규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피스카토르는 아리스토 철학과 라미즘을 절충한 인물이며, 라미즘에 집중적인 무게를 둔 절충을 시도했다. 그는 두 가지의 태도를 취하는데, 한편으로 캠브리지 교수 에베라드 딕비(Everard Digby)와 하이델베르그 교수 파레우스(Pareus) 및 제네바의 베자(Beza)와 같은 아리스토 옹호자의 공격에 반대하며 라무스와 아리스토 절충을 변론했고, 다른 한편으로 캠브리지 교수 윌리엄 템플(Temple), 코르바흐의 빌헬름 스크리보니우스(Scribonius), 하노버의 하이조 부셔(Heizo Buscher) 교수의 순수한 라미즘 옹호자의 공격에 대해서도 절충주의 입장을 변론했다.

히르보른 교육의 토대는 멜랑톤의 방법론을 참조하며 수정된 라미즘이 대세였다. 교사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라무스로 시작해서 아리스토로 끝내라고 가르친다. 라무스만 추종하는 자들 중에도 위대한 인물이 없고 아리스토만 추종하는 자도 동일하다.

피스카토르는 성경에서 교육적 사례들을 수집했고, 빌스타인은 철학적 신학적 사례들로 자신의 절충주의 입장을 채색했다.

멜랑톤의 추종자 선제후 크리스티앙 1세가 죽은 1590년 이후로 라미즘은 명백한 생매장을 경험해야 했다. 특별히 단찌히, 비텐베르그, 삭소니 등지에서.

호프만 논쟁이 발발했다. 호프만은 신학의 영역에서 철학적 추론을 절저히 제거할 것을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아리스토 철학을 비판하는 라무스의 목소리를 빌었다. 호프만 수하에 있던 카스파 파프라드(Caspar Pfaffrad)는 라미즘에 끌리게 되었는데 그것의 실천적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라미즘의 아리스토 권위에 대한 비토와 엄격한 삼단논법 추론의 거절 때문이다.

피스카토르는 난해한 신학적 주제들을 논하고 애매한 용어들을 다루곤 했으나 결국 그것에서 교리적 논점들을 뽑아내어 논제들을 배열하게 되었으며 동일한 방법을 구약성경 주석 전체에 적용했다. 용어들에 대한 인덱스도 만들었고 학생들이 쉽게 암기할 수 있도록 성경 전체를 몇 줄로 요약하는 작업도 추가했다.

헤르보른 교육:
피스카토르 주석보다 더 명료하고 간결하고 방법론적 체계를 갖추었고 청년들 교육에 적합하고 궁극적인 대학교육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일반인의 빠르고 정확한 가르침에 적합한 주석은 없다고 하였다. 피스카토르는 루터 이후로 단일한 인물이 성경 전체를 독일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다.

알스테드의 Encyclopeadia와 폴라누스의 Syntagma는 분석적인 문헌 주석에 대한 후기 라미스트 전통의 절정을 보여준다.

라무스의 핵심적인 주장은 '모든 주제를 논리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제는 하나요 동일한 논리적 방법에 의해서 최상으로 다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라무스 방법론의 핵심은 이렇다. 어떤 주제에 대한 논의는 가장 일반적인 정의와 분류에서 시작하여 보다 구체적인 정의와 구분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이런 라무스 방법론이 유일하게 철저히 적용되는 분야는 바로 백과사적 학문이다. 그것은 학습 전역에 공통된 원리들을 규정하는 식으로 시작되고 학습 전체를 개별 학문들로 분류하고 동종의 단일한 방법론을 따라 개별 학문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실천이 강조된다. 알쑤시우스(Althusius)는 '모든 학문은 실천에서 통합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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