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2일 일요일

Walter Ong의 라무스 이해 2

르네상스 이후의 스콜라적 논리는 중세의 논리와는 첨예하게 다르다. 즉 그것은 중세적 논리가 가정, 부연, 제한과 같은 속성들에 갖는 전폭적인 관심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및 르네상스 이후의 스콜라 사상은 비록 중세적 논리의 많은 특징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아리스토 논리는 완벽하며 거기에 어떠한 것도 추가될 수 없으며 어떠한 것도 추가되지 않았다는 칸티안 견해를 인증하는 경향을 보인다.

Peter of Spain의 Summulae logicales는 변증학 교본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실상은 십대 학생들로 하여금 아리스토 논리학 개념들과 친숙하게 되도록 보조할 목적으로 저술된 논리학과 변증학 입문서일 뿐이다. Summulae는 인간을 정의한 이후에 '변증학은 기술 중의 기술이며 학문 중의 학문이며 모든 교과과정 과목들의 원리들에 이르는 관문을 제공하고 있다'는 정의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논리학과 변증학은 하나도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스콜라 사상가로 간주하는 자들은 소수의 교수진 멤버이다. 스콜라 학자들을 꾸짓는 엘스무스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스콜라적 전통에 속한 자가 아니라 교부 전통으로 분류한다. 아리스토 논리학 문헌들과 피터 스페인의 문헌은 스코투스 및 토마스 학파들에 의해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언급된 문헌이다. 오캄의 저작들은 Summulae의 파생이다.

라무스가 야만인 목록에서 열거하는 인물들은 Jean Buridan, John Dullaert, Pierre Tartaret, Peter of Spain 등이다. Talon도 Summulae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는 가정들과 부연들과 제한들을 공격했다.

피터 스패인에 따르면, 소재(locus)는 논의의 좌소(sedes argumenti) 혹은 용이한 논의가 제시된 문제를 향하여 도출되는 출처라고 한다. 논의는 결론을 도출하여 의심스런 사안에 대해 확신을 생산하기 위해 결론을 유추하기 위한 수단이다. 첫번째 논제(locus maxima)는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는 다른 어떤 선행하는 혹은 보다 말이 알려진 명제에 의존하지 않는 명제'에 대한 것이다. 둘째는 그런 명제들 간의 차이(locus differentia maximae)에 대한 것이다. 이를 테면,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와 '하나의 정의가 어떠한 것에 대하여 서술된 것이든 정의된 그것은 서술된 것이다'는 것 사이의 타이 말이다.

피터는 이성(ratio)을 설명할 때에, 사물의 정의, 영혼의 힘, 어떤 것을 명료하게 만드는 언술 혹은 질료에 반대되는 형상 혹은 실체를 의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성에 대한 피터의 설명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진리'가 아니라 '믿음 혹은 신뢰'이다. 여기서 신뢰는 신학적인 덕이 아니라 수사학적 혹은 변증론적 용어이다. 이성의 개념은 18세기에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13세기에 이성은 학문의 기둥들 위에 지탱되지 않고 단순히 개연적인 변증학 혹은 수사학의 주제들 혹은 주장들 위에 지탱되는 것이었다.

13세기에 아리스토 논리학의 표준으로 간주된 Summulae logicales는 아리스토 논리학의 총체적인 윤곽을 제시하되 범주론, 삼단논법, 주제들 및 오류들 항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작은 논리학 저작들(Parva logicalia)는 Quaestiones super Porphyrii Isagogem, Quaestiones in librum Praedicamentorum, Quaestiones in primum librum Perihermeneias, Quaestiones in duos libros Perihermeneias, 폴피리의 이사고게, 아리스토 범주론, 두 종류의 해석학에 대하여, 궤변적인 반박들에 대한 주석들을 가리킨다.

Signification (의미)는 어떤 실체적인 것의 의미도 있는 이것은 '사람'과 같은 실체적인 명사를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고 형용사적 의미도 있는데 그것은 '하얀'과 같은 형용사를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다. 실체적 형용사적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은 단어의 양태이다. 형용성 혹은 실체성은 지시된 어떤 사물들의 양태나 차이들을 가리킨다.

res는 사물들을 가리키나 주로 논의중인 소여(matter under discussion)을 가리킨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지성적인 영역으로 전이된 어떤 것들을 가리키지 않고 초철학적 법적 사수학적 역사를 가진 특별한 언질이 없는 용어이다. 해당되는 케이스 정도가 되겠다.

Supposition(지칭)은 어떤 사물의 자리에(pro aliquo) 어떤 실체적인 용어를 수용하는 것이다. 의미는 어떤 사물을 가리키기 위해 어떤 단어를 부과하여 성취되는 것이라면 지칭은 어떤 사물의 자리에 이미 의미가 부여된 그 용어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의미는 지칭에 선행한다. 그것들은 동일하지 않다. 의미는 말(vox)에 귀속되고 지칭은 말과 의미로 구성된 용어들(termini)에 귀속된다. 그리고 의미는 기호(signum)를 기호화된 사물(signatum)로 돌리게 한다.

하나의 용어는 하나의 보편을 보편적인 것으로 대표한다. '인간은 종류이다 혹은 동물은 게누스다, 여기에서 인간과 동물은 마음 속에 있는 개념을 전제한고 이러한 보편적 전제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구별될 수 있다. 모든 가정들의 가장 일차적인 기초는 인간적인 가정이다. 보편적인 용어가 받아들여질 때 이를 테면 '사람이 달리다'는 문장에서 사람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모든 다른 사람들을 대표하는 말이다.

Ampliations(ampliationes, 확대)은 지칭들이 어떻게 질적인 수식어를 통해 제한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얀 사람'에서 '하얀'은 '사람'이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Iacobus Faber Stapulensis는 half humanist, half scholastic, just as Ramus himself was to be.

라무스가 빠리에서 공부할 당시에 다루어진 논리학자들: Juan de Celaya, Antonio Coronel, Luis Nunez Coronel, Juan Dolz, John Dullaert, Pierre Tartaret, Juan Ribeyro, Juan Martinez Siliceo, Gervase Waim, Jean Quentin, Robert Caubraith, David Cranston, Govin Douglas, John Major 등이다.

Murner의 표상적 논리학은 평범한 그림들 속에서 이야기가 진술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문'에서 신비를 제거했다. Digby의 표상적 진리론은 가시적인 그림의 도움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표상하려 한다. 이 두 사람의 사례가 가진 시사점은 크다. 이는 그림을 수단으로 삼은 방식은 실상을 다룰 뿐만 아니라 사유 자체도 다루도록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라무스의 논리학이 보여주는 배경은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키케로는 그리스로 갔고 들음으로 배웠다. 그러나 인문주의 사람들은 중세적 선행자들 같이 읽음으로 배우도록 조건지어 졌다. 기록된 문헌에 대한 의존과 결부된 정밀성과 고착성에 대한 스콜라적 학문적 열정은 인문주의 학자들에 의해 문헌적인 스타일의 문제까지 확대되었다. 스타일은 기록에 고착된 말의 양태에 의해 조정되며 그렇기 때문에 현시간의 유동성에 결박되지 않는다. 이것은 인문주의 학자들의 언어에 대한 태도였을 뿐만 아니라 실재로도 그러했다.

인문주의, 과거에서 도피할 수 없었고 스콜라적 경험을 부정할 수 없었으나 다만 한 두 가지 이유로 스콜라 사상이 억지를 특정 부분에서 최소화할 수는 있었다. 스콜라 사상의 가장 심오한 결과들은 인문주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인문주의 및 스콜라 사상은 서로 대립되는 운동으로 이해되지 말아야 한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복잡하다. 큰 부분에서 인문주의 사상은 스콜라적 정식의 산물이며 오늘날의 우리에게 스콜라적 용어들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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