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2일 일요일

Rudolph Agricola, 1444-1485

라미즘의 직전 역사에서 우리는 피터 스페인의 논리가 루돌프 아그리콜라 논리로 대체된 것을 발견한다. 여기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라무스 논리학이 저자 자신의 입술로 아그리콜라에서 파생된 것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며, 라무스 방법론은 라무스가 아그리콜라의 De inventione dialectica를 완성하기 위한 라무스 시도의 부산물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그리콜라 논리학은 불가피한 추상적 진리의 비인격성 일부를 성취했다.

버거스다이크에 따르면, 논리를 아리스토에서 키케로로 그리고 스토아 전통으로 전환시킨 인물들은 Lorenzo Valla, Juan Vives, 그리고 비베스의 선행자 Rudolph Agricola이다.

Melchior Cano, Francis Suarez, Robert Bellarmine, Francisco de Vitoria로 하여금 멜랑톤과 불링거와 알스테드를 언급하지 않게 만든 것은 크게 아그리콜라에게 뿌리를 둔 것인데 그는 논제들(loci)의 신학을 위한 초기적인 추진력과 그 소략한 이론을 제공한 인물이다. 아그리콜라가 정신적인 습관에 끼친 주된 영향력의 핵심은 변증학에 있다. 이것은 인문주의 사상이 모든 교과과정 속의 핵심적인 지위에서 제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많은 초기 인문주의 학자들은 문헌학자, 교육가, 문학자 등이었다. 아그리콜라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논리학자기도 했다.

에라스무스는 아그리콜라의 재능들과 중요성을 알았고 그것을 소유했다. 그는 자신을 웅변을 비롯하여 모든 배움의 영역에서 제2의 아그리콜라로 스스로를 호명하며 특별히 모든 철학을 의미했던 변증학에서 그런 정체성을 보유하고 싶어했다. 멜랑톤은 아그리콜라 가치에 고도의 존경을 표한 사람으로 에라스무스 다음이다. Alexander Hegius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들 혹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아그리콜라 탓이라고 하였다.

아그리콜라 명성은 대륙에 제한되지 않고 영국 캠브리지에도 이르렀다. 프랑스 내에서의 도입은 놀라운 속도로 일어났다. 빠리의 신학부 교수진은 일반학부 교수들이 아그리콜라를 아리스토보다 더 가르쳐서 고소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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