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4일 토요일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신학의 주체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감으로 신구약에 정통하고 신구약의 본질과 통일성을 가장 잘 정리하고 해석한 신학적 저술들을 남긴 바울의 정의에 따르면, 신학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에게만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라’는 찬송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로마서 11장 36절에 기초하여 진술된 아퀴나스 언어를 빌리자면, ‘신학은 하나님이 가르치고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이르는 것(Theologia a Deo docetur, Deum docet, et ad Deum ducit)’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신학은 하나님을 주체로 삼고 대상으로 삼고 목적으로 삼습니다. 이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포함한 모든 만물에 대하여 하나님이 처음과 나중에 되시며 궁극적인 내용과 목적이 되시는 것처럼, 신학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주체이며 궁극적인 대상이며 목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며,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과 하나되며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부가 될 것을 추구하는 신학은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주체가 된 활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신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선물이며 우리는 그 은혜의 선물에 참여하는 자로서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신학을 한다는 것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의 길은 철저한 자기부인 없이는 한 발짝도 내디디지 못하며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나 자신이 신학의 주체로 대체되는 순간 신학의 인간화는 필연적인 결과일 것입니다. 그렇게 다듬어진 인간적인 신학은 결코 진정한 신학일 수 없습니다. ‘죽음’의 차원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면 할수록 신학은 더욱 진실하고 순수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학이 모든 것들을 내던지고 비장한 각오로 생명까지 포기하는 무거운 십자가의 길은 아닙니다. 이는 주께서 인생의 사방을 막으셔서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 자체가 박탈되고 마지못해 떠밀려 가는 운명의 가시밭 길도 아닙니다. 신학은 인간에게 가장 좋고 행복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숨 막히는 기쁨과 감격이 차오르는 일입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자발적 결단과 설레이는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와 섭리에 참여하는 영광과 감격의 여정을 떠나는 것입니다. 당연히 신학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성정과 전인격을 다 동원해서 감사하며 감격하며 기뻐하며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력을 다해서 질주하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에 뛰어드는 자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러한 근원적 출발점을 상실하면, 그의 신학은 부실한 토대와 가증한 동기와 음흉한 목적과 야비한 내용들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어거스틴 해석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어떤 구절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진실한 신학적 언사는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도 때때로 신학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신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능력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교만의 독소를 뿜어내며 타인의 영혼도 죽이는 정죄와 판단의 악취만 역하게 풍길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을 구하든지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따라 구하지 않은 신학도 이것저것 건지는 게 많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국물도 없어야 하는데 십억이 넘는 인구로 구성된 기독교의 신학계에 뛰어들면 시장이 넓어서 이윤도 짭짤하게 창출하고 남 부럽지 않은 명예도 손쉽게 취득하고 삶의 편이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 주변에는 그런 목적에 군침 흘리는 파리들이 많습니다. 참된 하나님 지식에는 관심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이익의 방편이란 차원에서 신학을 수단적인 가치로만 여깁니다. 사랑은 그 대상 자체를 목적으로 삼습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데,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은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수단이 된 신학은 신학이 아닌 것이지요.

사랑과 지식은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 알 수 있다는 선순환적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신학은 교만만 부추기는 지식의 현학적 광란일 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대상과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겸손한 신학, 섬기는 신학, 나는 죽고 하나님만 증거되는 신학을 낳습니다. 신학에 ‘내’가 들어가면 들어간 만큼 하나님이 가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신학이기 위해서는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전혀 보이지 않도록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나는 없고 상대방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는 자만이 신학의 적격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나 봅니다.

이처럼 사랑과 자기부인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자기 편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타인 편에서는 진정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여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사셔서 완전한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계시에 가장 충실한 하나님 지식은 그런 연합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서 관찰한 내용을 언어로 번역하고 지면에 깔끔하게 배열하는 정도의 지식은 고작해야 ‘귀신도 알고 떠는 수준’일 것입니다. 나쁘게는 사물의 진정한 실체를 가리고 왜곡하는 방해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요 길입니다. 사랑 없이도 사물의 진정한 가치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분은 신학을 하지 마십시오. 신학을 해도 신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실체가 빠진 껍데기 신학을 신학이라 할 수 없음과 같습니다. 창세기의 1장 1절에서 계시록 22장 21절까지 가장 일상적인 언어와 모든 시대와 장소에 가장 보편적인 기록 방식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기 원하시는 자기의 모든 것들을 마치 애인에게 자신의 심장을 꺼내 사랑을 확증하듯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랑의 눈을 통해서만 보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역사 전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펼쳐놓은 사랑의 향연으로 보일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온 세상의 만물을 바라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기뻐하고 가장 높은 가치를 구현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간창조 이전에 6일동안 최적의 환경을 마련하신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과 사랑이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될 것입니다. 재앙과 고통과 억울함과 상처와 손해와 비난과 핍박과 기근과 죽음까지 사랑의 분량에 따라서 상대화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신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신학이 깊습니다. 사랑이 높을수록 신학도 높습니다. 사랑이 넓을수록 신학의 범주는 천하도 덮을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기에 신학도 덧없이 지나가는 땅에서의 일시적인 시간이나 공간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빠진 깊고 넓고 길고 높은 신학은 복잡과 혼돈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제도적인 신학이 아니라 내용적인 신학의 방법론은 사랑 뿐입니다. 사랑의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고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값없이 주어진 그 사랑의 은혜에 동참하는 신학의 참여적인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을 신학의 주체로 삼는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되 내가 죽고 그분이 내 안에서 사는 그런 철저한 자기부인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대로 그분을 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기독교적 자기부인 개념은 그냥 비우는 공(空)사상이 아닙니다. 그 개념은 신학의 존재론적 원리이신 하나님 자신과, 신학의 두 인식론적 원리인 외적인 인식의 원리로서 성경과 내적인 인식의 원리로서 믿음으로 채워져 나 자신이 주체로 설 자리가 없어지는 ‘주님으로 가득한 건설적 비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죽음의 차원까지 자기를 부인하는 자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신학의 참여적인 주체가 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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