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4일 토요일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신학의 대상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학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단지 신론의 교의학적 비중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언약, 작정, 예정, 창조, 구원, 그리스도 등은 신학의 궁극적인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떠한 주요 교리들도 엄밀하고 궁극적인 의미에서 신학의 대상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언약, 그리스도, 작정, 예정, 창조, 구원이란 교리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중차대한 주제들을 공부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절대성과 궁극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신학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은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며, 신학의 모든 교리적 논의들도 하나님을 가리키는 목적과 방향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신학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순간 신학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오늘날 신학은 대단히 세세하게 분화되어 크게는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으로 갈라졌고 각각의 영역 내에서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전문 분야들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간략하게 열거해 보면, 구약학(39권), 신약학(27권), 주경학, 성서 고고학, 사본학, 성서 언어학, 정경학, 해석학, 고대 근동학; 성경사, 교리사, 교회사, 해석사, 교부신학, 중세신학, 종교개혁 신학, 사상사, 교리문답; 신학서론, 신론, 성경론, 작정론, 예정론, 창조론, 언약론, 죄론, 기독론, 구원론, 화해론, 성령론, 교회론, 천사론, 종말론, 변증학, 철학신학; 목회학, 상담학, 설교학, 예배학, 전도학, 선교학, 윤리학 등입니다. 게다가 세부적인 분야들 내에서도 대단히 다양한 전문 영역들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앞에 열거한 전문영역 중에서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만 되면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교수직을 얻는 데에 큰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의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 것을 마치 신학의 전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 것처럼 여길 때에 스스로 속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사안은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는 사물에서 지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지식 이외의 모든 것들을 버리는 행위와 같은 것인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언어로 겨우 번역된 소량의 지식을 마치 그 사물 자체의 정보를 취득한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의 정보 취득하는 것을 사물 아는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각도로 본다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는 안다는 것을 내가 생각했던 지식이나 정보의 기대치 분량이 취득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물 전체의 있는 그대로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사물을 안다고 확신할 때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물의 본질을 알기 위하여 쪼개고 나누고 분할하여 그 사물의 마지막 단위를 찾아 극미시 세계를 파고드는 방식으로 거시적인 인간 및 자연 현상계를 탐구하는 환원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시대는 쪼개고 나누어야 비로소 인식이 된다는 환원주의 전제가 상식의 자리까지 장악했고 신학 뿐만 아니라 학문적 움직임이 일어나는 곳곳을 마치 유령처럼 배회하며 위력을 휘두르고 있는 때입니다. 환원주의 문화를 대변하는 세분화와 정밀화와 전문화와 분할화는 이제 대세를 이루었고 이를 거스르는 자는 ‘몰지각’과 ‘야만’이란 비난의 막대한 저항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지각은 전혀 다른 차원의 지극히 높은 극거시 세계를 다루는 성경의 전체 텍스트를 파악할 수 없도록 그런 환원주의 시대적 조류에 깊이 적응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풀 때에도 쪼개는 분할 접근법을 취합니다. 하지만 비록 성경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분할하고 쪼갠다 하더라도 인간은 성경이 의도하는 의미의 세계를 자력으로 진입할 수 없는 인식론적 한계라는 착고에 결박되어 있습니다.

환원주의 정신을 따라 신학의 어떤 한 부분을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쉽습니다. 세상의 일반학문 분야도 이런 방식을 지원하며 그런 방식을 취하는 신학에 교제의 손을 뻗고 있습니다. 즉 세상은 화원주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연구하고 글도 쓰도록 전반적인 체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흐름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환원주의 접근법이 신학을 함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떤 한계와 문제가 있는지를 진중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정론 혹은 언약론을 전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약의 디도서 혹은 유다서를 전공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구약학의 고대 근동어 혹은 고대 근동학을 전공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설교학 혹은 상담학을 전공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부학의 터툴리안 혹은 어거스틴 신학을 전공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철학적 기독론 혹은 보편적 구원론을 전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수한 전공 분야들을 열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단지 몇 가지 사례들을 열거하는 이유는 신학을 공부할 때에 부분만을 전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자고 함입니다. 신학의 세부적인 전공에 지성의 날을 갈아야 하는 현상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도 아만두스 폴라누스 신학을 중심으로 신학의 체계형성 문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의 이러한 전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범하기 쉬운 오류는 경계해야 되겠기에 비록 아프고 거북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전공조차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낮추고 ‘부인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비록 뼈를 묻기로 작정한 전공분야 값어치가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태도가 오히려 신학적 작업의 실체를 보다 올바르게 해명하는 길일 것입니다. 과장된 거품을 확실하게 빼지 않으면 스스로도 속고 다른 사람들도 속이는 작업은 단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권유하고 싶은 신학 방법론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주제를 신학의 중심으로 택한다면 부분화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어떤 주제를 전공한 이후에 그것과 관련된 여러 분야들을 연구하여 전문성의 지경을 넓혀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분에서 전체로 이동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 이외에 어떤 주제를 전문 영역으로 택하고 그것과 연관된 분야들을 다 다룬다고 할지라도 그 주제를 중심으로 신학 전체를 전개하게 된다면, 결국 그 주제가 ‘줄기’가 되고 하나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주제들은 ‘가지’로 상대화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습니다. 결국 신학의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은 땜질 수준을 뛰어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신학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명예와 생계를 위해 나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상품화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당연히 하나님 지식도 내가 더욱 매달리고 몰두하고 파고드는 나의 전문분야 천착에 의한 상대화 유혹의 촉수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불가피한 문제는 오직 하나님을 신학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다른 모든 교리들을 전개할 때만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신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즉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것으로서 그의 존재방식 및 속성을 알아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외적인 것으로서 그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 및 속성과 그의 행하신 일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영원성과 무한성과 불변성 등과 같은 속성들, 나아가 작정과 창조와 창조 이후의 섭리 전반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자신을 신학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신학의 전영역을 다 건드리되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각각의 전문 분야들을 탐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교리나 주제나 분야를 다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중심에 계시지 않는다면 과장과 불균형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 합당한 분량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공자들 개개인은 낯 뜨거운 자화자찬 없이도 전공하는 분야의 가치 상승에 편승하여 자신의 간접적인 가치 상승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특별한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잘 알고 가감 없이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여 교회를 섬기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알고 모두가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전공은 폄하하고 자신의 전공은 과장하여 청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사로잡기 위해 경쟁하는 시장경제 논리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시대에 제왕적인 위세를 떨쳤던 ‘시장의 논리(mammonism)’에 중독되어 자신의 전공을 상품가치 높이듯이 과대하게 광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지적이 가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신학을 한다는 것에 얼마나 엄중하고 철저한 자기부인 기준이 적용되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신학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전인격과 치열한 자기부인 전쟁을 치르는 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추구되지 않도록 자기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싸움 말입니다.

신학함에 있어서 어떤 분야를 전공하든, 어떤 주제를 강의하든, 어떤 내용으로 논문을 작성하고 게재하든, 어떤 본문으로 설교하든, 어떤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든 하나님을 궁극적인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면 건강하고 온전하고 통합적인 진리지식 전달과는 어떠한 형태로든 멀어질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beatitudo)도, 인간의 위로(Erlosung)도, 하나님의 언약(pactum, foedus)도, 하나님의 작정(decretum)도, 그리스도 예수(Christus)도, 하나님의 구원(salus)도, 영원한 생명(vita aeterna)도, 하나님의 은혜(gratia)도 신학의 궁극적인 대상이 아니기에 그것을 향하여서 혹은 그것에 근거해서 신학을 전개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에도 위에 열거된 주제들을 중심으로 신학 전체를 구성하려 했던 경우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교리를 하나님 자신의 상대화가 초래될 정도로 신학의 목적인 것처럼 여기지는 않았으며 혹 그러한 실수가 있더라도 우리가 따르고 지향해야 할 바는 아닙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