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4일 토요일

신학의 분류 1: vera et falsa theologia -- 1편


신학의 통일성과 전체성을 주장하며 분류를 논하는 것이 마치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환원주의 방식으로 접근해서 통일된 전체성에 이르는 학문연구 방식은 인간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의식의 초점이든 시각의 초점이든 인간은 두 대상에 대하여 동시에 초점을 조준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번갈아 가며 초점을 이동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완전히 극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선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환원주의 생략하고 전체성만 강조하면 상실되는 진리의 오묘하고 독특한 내용들이 너무도 많을 것이고, 전체성에 이르지 않고 환원주의 내에 안주하는 것도 전체성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확인되는 진리의 분량을 토막 내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 것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관점으로 이해함이 좋을 듯합니다.

대부분의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이 신학을 분류할 때에 처음으로 논의한 구분은 참된 신학(vera theologia)과 거짓된 신학(falsa theologia)입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그들의 고유한 발명이 아닙니다. 어거스틴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그 논쟁과 1532년 시편 주석에서 이성의 신학(theologia rationis)을 거절하는 문맥에서 참된 신학과 거짓된 신학을 나눕니다. 그에게 있어서 참된 신학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지식(in Christo crucifixo est vera Theologia & cognitio Dei)이며 또한 그렇게 계시된 참되신 하나님과 그에 대한 참된 경배와 관계된 것(de vero Deo, & vero Dei cultu)입니다. 나아가 거짓된 신학은 하나님을 난폭한 분으로 이해하는 무리들의 오류(Falsa theologia est Deum esse iratum agnoscentibus peccata sua)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신학과 거짓신학 구분의 보다 체계적인 형태는 쯔빙글리의 De vera et falsa religione(1525)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종교(religio)’라는 말의 기원과 관련해서 키케로가 [신들의 본성(De natura deorum)] 2권에서 경건한 사람들(religiosi)은 매사에 신들을 경배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주의 깊게 사려하고 반복해서 읽기(relegerent) 때문에 그 용어를 썼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의 모든 경건(pietatem totam Christianorum), 즉 신앙과 삶과 계명과 의식과 성례 등을 포괄하는 용어로서 ‘종교’라는 말을 쓰겠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서 산출되는 경건의 잔을 마시기 이전에 참종교와 거짓종교 구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어떠한 거짓종교 즉 어떠한 미신(superstitio)을 토해내고 내던져야 하는지를 의식하며 참종교를 살피기 위함이라 말합니다. 논의의 순서에 있어서는 진정한 종교를 논한 이후에 거짓종교 다루는데, 그 이유는 참종교에 대한 바른 지식과 기준 없이는 거짓종교 논의가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쯔빙글리 신학이 말하는 종교는 종교가 지향하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과 종교를 통하여 그 대상에 도달해야 하는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 없이는(nisi ante omnia Deum agnoueris, hominem uero cognoueris)’ 결코 종교를 합당하게 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칼빈의 기독교강요 첫 페이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칼빈이 우리가 가진 모든 지혜의 총화(tota sapientiae nostrae summa)가 하나님과 우리를 아는 지식(Dei cognitione et nostri)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 것은 그가 De falsa et vera religione를 읽었기 때문에 쯔빙글리 영향의 증거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쯔빙글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무한한 분이지만 철학이 하나님에 대하여 제공하는 빈약한 개념(μικρολοία)만 가진 자들도 오직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모든 존재, 즉 그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능력이 그가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 분명히 보여 이방 사람들도 다 알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과 목소리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신존재의 보편적 지식을 확신하며 주장하는 쯔빙글리 접근법은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문제는 신존재 증명의 가능성 여부가 아니라 그 존재하는 신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그를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에 곧장 자신을 향하여 돌아가서(ad se conuersi) 스스로가 신개념의 소스가 된다는 사실에 있다고 쯔빙글리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미신은 바로 사람의 머리에서 산출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신학자가 사람의 지혜에서 발굴해 낸 어떠한 신개념도 가증하고 거짓된 종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falsa religio, quicquid a theologis ex philosophia, quid sit Deus, allatum est). 그리고 다신론은 이처럼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각자가 스스로 고안해 낸 다양한 개념의 옷을 입혔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라고 말합니다. 가증하고 불경한 종교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는 당연히 우리의 이성과 지각을 초월하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 자신의 입술을 통해서만(ex eius ore) 배워야 할 것입니다. 즉 쯔빙글리 논의의 결론은, 하나님 자신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에 기초한 하나님 지식만이 참된 종교라는 것입니다. 칼빈도 표현이 조금 다르지만 쯔빙글리 입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종교 개혁자들 진술을 신학의 보다 조직적인 체계 속에서 재정립한 인물은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 1545-1602)입니다. 그는 De vera theologia에서 먼저 어원적인 논의에서 입증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빛(naturae lux), 모든 사람들의 합의(consensus omnium populorum) 그리고 신학 자체(res ipsa)의 본질적인 주제에 의해서도 신학의 존재는 분명함을 명시한 이후에, 신학의 본질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위해서는 참신학과 거짓신학 구분이 필요함을 밝힙니다. 그는 신학의 종류가 다양한 것은 인간적인 판단과 지각이 갖는 오류와 부패성이 신학 대상의 단일한 진리성에 애매함을 가하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인간이 거짓을 진리로 간주하는 패단은 판단의 부패성과 지적 무력(ex iudicij vero nostri deprauatione et pituita sensum)에서 온다는 말입니다.

거짓된 신학의 형태는 두 가지, 즉 평상적인 것(vulgaris)과 철학적인 것(philosophica)으로 나뉩니다. 거짓 신학의 평상적인 형태는 인간 본성의 불완전한 원리들에 내제된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짓 신학의 철학적 형태는 그릇된 주장 때문에 거짓된 결론에 이르게 만드는 것인데 이는 미신신학 혹은 설화신학, 자연신학, 정치신학 형성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분법은 어거스틴이 신국론(De civitate Dei) 6권 5장에서 베로(Varro)의 구분에 의존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에 폴라누스, 고마루스, 튜레틴과 같은 정통 개혁주의 학자들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특별히 폴라누스 경우에는 참신학과 거짓신학 구분 이후에, 거짓된 신학이 하나님과 그의 뜻과 행하신 일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opinio falsa)를 가진 신학인데, 고대 이방인들 혹은 신적인 것에 대하여 오류를 범하는 자들의 신학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대 이방인들 신학은 세 가지의 세련된(exiquisita) 설화신학, 자연신학, 정치신학 형태를 취하는데, 설화적인 신학(fabulosa theologia)은 시인들이 즐거움을 선사할 목적으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신학이며, 자연적인 신학(physica theologia)은 철학자가 하나님과 어떤 신적인 것들에 대한 흔적을 자연에서 찾아 가공한 신학이며, 정치적인 신학(politica seu civilis theologia)은 특정한 도시에서 성직자나 통치자가 일반적인 관례를 따라 발의하고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 결국 종교의 권위를 일반 사회에 견고히 세우려는 목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어서 그는 ‘도시적인 신학(theologia urbana)'이란 표현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적인 것에 대하여 오류를 범하는 자들의 신학에 대해서는 유대인과 모하메드 추종자와 유사 그리스도인 및 이단들의 신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신학에 진리의 조각(aliquid veri)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서 근본적인 오류를 지녔기 때문에 ‘거짓된 신학’이라 규정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고 투레틴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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