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종교 개혁자 마틴 부써(Martin Bucer, 1491-1551)는 누가복음 3장 주석에서 신학을 ‘경건하고 복되게 살아가는 삶의 학문(scientia pie et beate vivendi)’이라 했습니다. 나아가 참된 신학은 이론적인 것도 아니고 사색적인 것도 아니며(theoretica vel speculativa) 역동적인 것이며 실천적인 것(activa et practica)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요 교육가인 페트루스 라무스(Petrus Ramus, 1515-1572)도 신학을 ‘바르게 사는 교리, 즉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는 복된 삶의 완전하고 총체적인 교리(doctrina bene vivendi, totamque beatae vitae ac perfectam doctrinam sacris utriusque testamenti libris amplectitur)’라고 말합니다. 보편적 교회의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했던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도 신학을 ‘영원토록 복되게 살아가는 지식(the science of living blessedly for ever)’이라 했습니다. 퍼킨스의 제자인 윌리엄 에임즈(William Ames, 1576-1633) 역시 예수님이 ‘영생의 말씀’이란 베드로의 고백과 우리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겨야 한다’는 바울의 교훈에 근거하여 신학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교리(doctrina Deo vivendi)’라고 말합니다. 퍼킨스와 에임즈의 지대한 영향 속에서 마코비우스도 '신학은 이론적인 부분과 실천적인 부분으로 구성되고 영원히 올바르고 복되게 살아가는 방도를 가르치는 학문(Theologia est disciplina partim theoretica, partim practica docens modum, bene beateque vivendi in aeternum)'이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무한한 진리가 인간의 시공간적 삶으로 다 번역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계시되고 주어진 기본적인 이유는 지켜 순종하며 사는 삶에 있습니다. 신명기 29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즉 하나님께 속한 ‘감추어진 일’이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에게 나타내신 계시의 말씀은 행하며 살도록 주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감추어진 일’이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 전체를 혹은 비록 진리의 한 조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차원의 의미 세계까지 우리의 삶으로 다 담아낼 수는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이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스스로 속임과 하나님 만홀히 여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바빙크가 그의 [개혁주의 교의학] 1권에서 잘 언급한 것처럼 성경은 ‘신앙과 삶의 표준이며 규범(norma et regula fidei et vitae)’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성경이 지향하는 방향을 따라가며,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증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깁니다. 성경이 신앙과 삶의 표준이요 규범이라 한다면, 신학은 신앙의 표준과 규범도 제시하는 동시에 삶의 표준과 규범도 증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 ‘삶’은 눈에 보이고 우리의 지각으로 의식되는 영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이란 이분법의 후자를 가리키는 것만도 아닙니다. 삶이란 한 사람의 전인격과 언어와 행위를 당연히 모두 포괄하되, 인류 전체의 과거 현재 미래의 전 역사까지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학을 삶의 교리라고 규정했을 때에는 그 범위가 개개인의 전인격과 일대기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 전체를 망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삶에 경계선이 있을까요? 어떤 선까지만 삶이고 그 너머의 영역은 삶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한 개인의 지극히 찰나적인 현재적 삶과 잇닿아 있지 않은 것이 과연 있을까요? 과거는 기억이란 이름으로, 미래는 소망이란 이름으로 찰나적인 '현재'에 개입하고 있기에 삶을 시간의 역사 전체로 확대하여 생각함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눈에 관찰되고 의식의 촉수가 더듬는 영역만이 삶이고 그 바깥은 삶과 무관한 것일까요? 물 위에 떠오른 빙산의 일각이 그것을 떠받치는 하부가 없어도 멀쩡하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물과 공기와 흙과 빛과 입자가 없는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꿈이 없는 삶은 단 하루의 삶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공동체가 없고 세상과 온 우주의 정교한 질서와 조화가 없다면 삶의 의미와 보존도 없습니다. 언어와 사유가 없고 만남과 대화가 없는 삶은 죽음의 보다 끔찍한 형태일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을 통해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지구촌 전체는 물론이고 극미시 세계에서 극거시 세계까지 삶의 영역으로 의식하는 지적 경지까지 왔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재도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지녔으며 그 형상을 온전하게 이루는 것이 삶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우리의 삶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어 하나님께 영광의 찬미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중에 우리의 삶과 이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궁극적인 대상으로 삼는 신학은 당연히 하나님이 이루시고 붙드시는 그 모든 것들을 취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은 우리 개개인의 삶과 분리될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신학은 한 개인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지극히 평범한 일상부터 지극히 높으신 분을 경배하는 인생의 가장 고급한 목적까지, 나 자신에 대한 것에서 나를 둘러싼 모든 가시적 비가시적 환경까지, 시간적인 면에서는 출생부터 사망까지, 심지어 출생 이전부터 사망 이후까지, 하나의 점에서 온 우주로 그리고 우리가 장차 거하게 될 천국의 처소까지 개입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연과 인간과 사회와 국가와 지구와 온 우주와 사후의 세계까지 신학 바깥에 있는 영역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신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계시의 범위만큼 더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계시의 범위는 피조의 세계 전체와 심지어 신의 영역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성경이 가는 곳만큼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간 것보다 더 멀리 더 깊이 더 높이 가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성경이 알도록 펼쳐놓은 영역 출입하길 포기하는 판단도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이 이처럼 무한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흥분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얼마나 두렵고 떨어야 하는 사실인지 모릅니다. 이에 대하여 교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밝고 화려한 점도 증거하고 있지만 부정적인 어두움에 대한 교훈에 있어서도 결코 침묵하지 않습니다. 중세 카톨릭의 부패는 그 대표적인 어두움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 삶은 일곱가지 성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세례성사(sacramentum baptismi), 신앙의 성숙을 도모하는 견진성사(sacramentum confirmationis), 인간의 영혼에 영적 양식을 제공하는 성체성사(sacramentum eucharistiae), 죄와 죄로 말미암은 상처를 치유하는 고해성사(sacramentum poenitentiae et reconciliationis), 결혼을 축복하는 혼인성사(sacramentum matrimonii), 말씀 가르치고 다스리며 성례를 집례하는 지도자의 부르심을 받는 신품성사(sacramentum ordinis),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과 병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병자성사(unctio infirmorum) 등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러한 성례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축복도 놓치고 인간의 진정한 삶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비록 로마 카톨릭이 어거스틴 용어를 따라 성례를 ‘보이지 않는 은총의 보이는 형식(invisibilis gratiae visibilis forma)’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들은 7가지 성례를 예수님이 제정하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성찬과 세례 외에 어떤 성례도 제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보다 심각한 것은 교황을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vicarius filii Dei)’요 보이는 교회 전체의 머리로 삼은 계층적인 사제 시스템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그리스도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하게 말한다면, 이는 성자 하나님과 비기려는 일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비기려고 했고,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아담과 하와까지 자기의 성향대로 유혹했던 사단의 가증한 교만과 너무도 유사해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 가증한 교만의 제도화된 오류로 한 사람의 인생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출생부터 사망까지 한 개인의 전 영역을 간섭하되 스스로를 진리의 중개자로 여기고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 대리자를 자임하며 그 개인을 가감된 '진리'의 굴곡된 ‘빛’으로 안내하는 것보다 더 두렵고 떨리는 죄악은 없을 것입니다.
신학은 삶의 전 영역을 관여하고 있지만 그 신학이 변질되면 이처럼 한 개인의 삶 전체를 무서운 어두움 속으로 내던질 수도 있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한 공동체와 사회와 나라와 세계도 그런 파멸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여러 이단들의 교리와 행실을 보십시오.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탈취하되 영혼까지 앗아가는 죄악을 서슴지 않습니다. 어떤 부족 공동체는 잘못된 종교에 중독되어 보편적 인륜에도 반하는 일들을 아무런 의심이나 거리낌도 없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온 인류가 집단적인 최면에 걸려 난리와 전쟁이 그치지 않는 것도 마태는 신학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학과 삶은 분리할 수 없도록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신학의 변질은 삶의 부패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신학의 회복은 부패하고 절망적인 삶에 회복과 소망의 빛을 던져줄 수 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토록 바르고 복되게 살아가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올바른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신 그리스도 예수를 대신하는 어떠한 피조물 중개자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신학은 한 사람의 인생에 그리스도 예수만이 전부가 된다는 사실을, 출생부터 사망까지 태초부터 온 우주의 종말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그리스도 예수만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라는 사실을, 인생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인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충만하게 살아내며 전파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이 모두 하나님 자신이란 신학의 정의가 단순히 관념적인 사색만이 아님을 강조한 가장 간결한 표현이 있다면 바로 ‘신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행하심은 모두 우리의 삶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하고 살며 기동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이처럼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과 그의 모든 섭리는 우리의 삶과 무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지 못하면 바른 신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신학이 바르지 않으면 바른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삶이 없으면 신학도 없고 신학이 없으면 삶도 없습니다. 이러한 신학의 정의에 근거하여 나의 전인격과 언어와 행실과 일생이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란 사실을 삶의 현장에서 열매를 맺으며 삶의 실천으로 향기를 발하는 진정한 신학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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