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빙글리 선생이 잘 지적하신 것처럼, 인간의 성향과 본성으로 보자면(ad ingenium et naturam hominis)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진리 인식에 있어서의 차이는 인간 편에서가 아니라 진리를 조명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해석되어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고 안하고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적 부패성에 대한 쯔빙글리 입장은 너무도 단호한 것 같습니다. 즉 그는 모든 인간의 모든 하고자 하는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모든 것을 스스로 (ad seipsum) 헤아리기 때문이며, 궁극적인 면에서는 자기만을 (sibi uni) 돌아보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de seipso) 더 영광스런 존재로 생각이기 때문이라 하는군요. 나아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가 빚어내는 결과로서 인간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자기를 사랑하며 스스로에 대하여 열광자(sui amans ac studiosus)가 된답니다. 심지어 이방인 지성들도 인간의 모든 생각이 스스로를 지향하고 있다(oia consilia nostra in nos ipsos dirigi)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쯔빙글리 지적은 단순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의 경우만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본성과 성향에 있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부인’ 졸업하신 분은 아무도 없기에 누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혹 결혼 안했다고 안도감 느끼시는 분 없으시죠? ^^ 설마~~) 즉 종교나 신앙을 막론하고 누구나 거짓 신학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잘 나가는 신학자도, 강의력이 탁월한 교수도,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목회자도, 스폰지와 같이 진리를 대량으로 흡수하는 신학생도 사람인 이상 내장된 거짓신학 씨앗이 언제 만개할지 모른다는 긴장의 끈을 하루라도 늦추지 말아야 되겠네요.
사실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야 비로소 지적 무기력과 굴곡된 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떠나서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졌습니다. 혹 유일하게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켜 마치 인간도 자존적인 존재로 만들어 졌다고 우기며 존재성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비기려는 무모한 오만의 악취를 그럴듯한 논리로 무마시켜 고의적인 실수를 감행하는 분은 없으시죠? 바울은 우리가 존재하고 살고 활동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함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만물과 호흡과 생명조차 스스로 생산하며 자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선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우리의 전 존재를 통째로 선물이라 규정할 수 있겠네요.
지식은 대체로 보는 눈의 관찰과 듣는 귀의 기능에 의존하여 입수된 파장이 뇌의 복잡하고 신비로운 절차를 거치고 어떤 층에 도달하여 펼쳐지는 시상과 그것에 대한 분석으로 산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의 있는 그대로가 지식의 모양새를 갖추는 과정을 언어로 분할하고 구분된 몇 단계로 묘사하긴 했지만, 사실 보다 엄밀한 구분법을 적용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단계들이 지식산출 과정에서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고 고려할 수도 없이 생략되되 그 생략의 실상도 파악되지 못하도록 무의식의 영역을 무한대로 출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식을 취득함에 있어서 도대체 우리가 의지를 동원하여 행했다고 생색낼 수 있는 것들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이며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에 있어서 내가 하는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지식은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합리적인 이성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식과 관련하여 우리가 겨우 하는 일이 있다면 은혜로 주어지는 지식에 하나님께 등 돌리고 저항하는 못된 방향성을 부과하는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식이 은혜라는 측면 외에도 우리가 더 생각해 볼 것은, 무수한 단계를 거치는 사물의 인식 과정에서 구성과 재구성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횟수를 반복하여 사물의 있는 그대로와 지식 사이에 쉽게 가늠되지 않는 갭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지각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정밀한 도구와 발단된 기술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 박혀 있는 인식의 이러한 한계와 무기력은 벗어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언어의 탁월한 표현력과 수리의 살인적인 정교함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지식의 ‘놀이’ 수준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이러한 ‘놀이’의 세계에서 조금 똑똑하고 조금 덜 똑똑한 것의 유치한 차이를 과장하여 명예나 돈벌이 및 정치권력 ‘놀이’까지 확장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민망한 일인지 모릅니다. 인간의 지식취득 방식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인데 자기 우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남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지각하지 못하며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도 못하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면 그런 은혜를 주신 주체의 뜻을 받들어 겸손히 섬기는 것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가시적인 것에 대한 지식도 이렇듯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가리키지 못하는데 하물며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지적 박약함이 얼마나 더 심각한 차원까지 그 위력을 떨칠까요? 그나마 보이는 것들의 가시적인 경계조차 없으니 오류의 심각성은 측정할 도구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종교도 많고 이단도 많은 것은 보이지 않으니까 검증도 어려우니 더 쉽고 실감나게 속일 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신학을 거짓으로 규정하기 위해 정죄의 칼을 뽑는 것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언제나 사랑은 바깥을 향하게 하고 엄밀성은 스스로를 겨냥함이 좋습니다.
참신학과 거짓신학 구분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다면, 이 구분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시와 전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감사와 겸손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신학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고 안심하는 수단으로 이 구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즉 나는 이방인이 아니고 불신자도 아니고 유대교나 이슬람에 빠지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참신학의 주체라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확신하며 안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다른 종교에 탐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신학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계속 논의할 것이지만, 참신학의 개념은 거짓신학 거부로 주어지는 자동적인 반대급부 보상이 아닙니다.
참된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당연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도 참신학의 소유자가 될 수 없으며,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로 조명하사 인간의 부패한 합리성과 본성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은혜의 지속적인 수혈이 없이는 한 순간도 스스로 참신학의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음을 인정하며 감사와 겸손의 무릎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참신학과 거짓신학 구분의 기준이 결국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는 쯔빙글리 교훈은 모든 교리적 논의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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