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5일 일요일

신학의 분류 2: sapientia et scientia


세상에는 수많은 거짓 신학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일일이 탐구하고 논한다면 생명과도 같은 소중한 생의 순간들을 허무한 것에 매여 탕진하게 만들려는 사단의 전략에 말려드는 셈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진리에 대한 거짓된 진들술을 읽고 분석하는 중에 신학의 등뼈는 차츰차츰 거짓된 진술에 반응하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휘거나 기우뚱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모든 거짓된 신학에 정통한다 할지라도 참신학에 대한 깨달음과 소유가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는 달리 참신학을 알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하는 동시에 거짓된 신학의 음흉한 거짓들을 세세하게 알지 못해도 거절하고 피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깁니다. 이는 보석 감정사가 짜가를 신명나게 탐구하지 않고 오히려 진품을 열애하듯 몰입하며 배우고 익히는 방식을 취함과 같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거짓된 신학은 신학이 아니기에 신학은 하나이며 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참신학을 배운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폴라누스 신학에 따르면, 참신학의 존재(theologiam veram esse)는 증거 뿐만 아니라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도(tum ex testimoniis, tum rationibus)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증거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적인 증거(divina testimonia)는 성경의 증거(특별히 욥기 12:13, 로마서 11:33, 신명기 4:6)를 일컫는 것으로서 이에 따르면 참신학은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혜(sapientiam rerum divinarum)’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증거(humana testimonia)라는 것은 일반적인 것(generale)과 특별한 것(speciale)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우주적 동의(universalis consensus omnium populorum)는 일반적인 인간적 증거이며, 이에 대해서는 이방인 철학과 역사와 시와 신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별히 저스틴 마터의 Cohortatione ad Graecos,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의 Protreptico ad Graecos와 Stromatum, 락탄티우스의 Divinae institutiones, 테오도루스의 Graecarum affectionum curatio, 어거스틴의 De civitate Dei 등이 좋은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특별한 인간적 증거라는 것은 교회의 증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교회는 참된 신학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기쁨으로 추구하는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에 특별한 증거인 것입니다.

이성적인 사유에 의해서도 확인되는 참신학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폴라누스 입장을 정리하면, 1) 하나님이 계시다면 신학의 존재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으며, 2)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라 한다면 신학의 존재는 필연적인 것이며, 3) 하나님이 개별적인 사물에 대하여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각 사물의 참된 지각과 결부되어 있는 보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분이라면 신학의 존재는 필연적인 것이며, 4)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그 모든 것들에 보이지 않는 위엄의 흔적을 남겨 두셨다면 신학은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참신학의 존재는 결국 전적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냐에 의존하고 있어 보입니다.

이제 이렇게 존재하는 참신학은 지혜(sapientia)인지 아니면 지식(scientia)인지 물어야 할 단계에 왔습니다. 먼저 이런 용어들이 가진 어원적인 의미를 살피고 그것을 중세 및 개혁주의 학자들은 어떻게 수용하고 발전시켜 왔는지를 살피는 방식으로 이 구분을 풀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지성적 성향과 관련해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되고 중세를 통해 전수된 앎의 이성적인 성향 (habitus sciendi rationalis)의 5가지 기본 유형들은 인지 (intelligentia), 지식(scientia), 지혜 (sapientia), 분별 (prudentia), 기술(ars)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지’는 ‘직관적인 앎으로서 논증 없이 즉각적인 인정을 통해 원리를 아는 것’입니다. ‘지식’은 ‘논증을 통해 자명한 원리에서 도출된 결론들에 대한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세에는 이 용어가 ‘궁극적인 목적들을 아는 지식’으로 이해된 경우도 있습니다. ‘분별’은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우연적인 상황들에 적합한 실천적인 파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술’은 ‘의도한 효과나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들과 방법들을 아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지식’ 특별히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 신학에 필수적인 것임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신학은 하나님 사랑을 갈망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지혜’와 더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아퀴나스(Thomas Aquinas) 경우에는 신학을 지식으로 규정하되 보다 고차원적 지식의 빛 즉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알려진 자명한 원리들에 의존한 지식이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신학의 지혜적 차원을 배제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신학을 가장 고급한 형태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어떤 원리들을 증명하는 자연적 이성과는 달리 신학적 지혜는 계시된 지혜이며 다른 모든 학문들의 진위를 가늠하는 표준이라 했습니다. 아퀴나스 후세대의 대표격인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입장은 약간 다릅니다. 그는 신학이 비록 고차원적 지식에서 도출된 원리들을 가졌고 이성의 사용으로 그 원리들에 근거한 결론들을 끌어내긴 하지만 지식의 결정적인 요소가 빠졌는데, 즉 논증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신학이 그 자체로 자명한 필연적인 이성(rationes necessariae per se notis)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계시된 지식은 자명한 필연적 이성의 항목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지식으로 불려질 수는 없고 그 자체를 따라서 지혜(theologia secundum se est sapientia)라고 규정하는 것이 보다 적합한 신학의 의미라는 입장을 펼칩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도 신학의 특성이 지식이냐 지혜냐에 대해 적극적인 논의를 했습니다. 특별히 튜레틴(Francis Turretin)은 지식에 찬동하는 방식들을 ‘지식’과 ‘믿음’과 ‘의견’ 세 가지로 구분한 후 첫째는 이성에 의존한 것이고, 둘째는 증언에 의존하고 있으며, 셋째는 가능성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학은 이것들 중 어느 것 하나와도 일치될 수 없답니다. 앎의 이성적 성향들에 속한 모든 것들은 신학의 한 특성을 가리킬 수 있겠으나 단지 비유적인 차원에서 그러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학을 인지, 분별, 기술 등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그 자체의 빛을 따라 원리만을 아는 ‘인지’는 계시에 의해서 원리와 결론 모두를 아는 신학과 동일할 수 없으며,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실천이나 행위들과 관계된 앎을 의미하는 ‘분별’은 행위의 시민적인 성격을 넘어서 영적인 행위(agenda)도 포함하고 믿어야 할 것들(credenda)까지 취급하는 신학과 다르며, 효력이나 결과를 지향하는 지식이라 할 수 있는 ‘기술’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 덕스러운 행위도 추구하는 신학에 비한다면 여전히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케커만(Bartholomaeus Keckermann)과 같이 신학을 ‘삶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종교적 분별(prudentia religiosa ad salutem per vivendi)’이라 규정하는 개혁주의 학자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볼레비우스 (Johannes Wollebius) 같이 신학이 앎의 관상적인 측면과 행위적인 측면을 포괄하고 있다는 이유로 신학을 지혜와 분별의 종합이라 규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의 유형에 대한 대체적인 개혁파 정통주의 논의는 지식과 지혜로 좁혀질 수 있습니다. 먼저 신학을 지식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다네우스(Lambert Daneaus), 퍼킨스(William Perkins) 등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각각 신학을 ‘하나님의 영광과 믿는 자들의 구원에 이르는 지식,’ ‘영원토록 복되게 살아가는 지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지식’을 단순히 합리적인 이성의 산물로 보지 않고 제1 원리들과 그것에서 도출되는 결론들을 아는 지식일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증거에 기초한 지식의 체계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존중하되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앞세우는 우선순위 문제에 있어서도 아무런 혼돈이 없었던 분들입니다. 신학을 지혜로 규정한 분들 중에는 유니우스(Francis Junius), 트렐카티우스(Lucas Trelcatius), 샬피우스(Johannes Scharpius), 폴라누스(Amandus Polanus), 왈레우스(Johannes Walaeus) 등이 있습니다.

트렐카티우스 경우에는 독특한 입장을 펼치는데, 우리가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고려하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scientia)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 혹 사물 그 자체를 고려할 경우에는 하나님이 자연적인 수단들을 통해 우리와 소통하신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혜(sapientia)로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하나님 자신을 신학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신학을 지혜로 규정하며 그런 신학적 지혜는 ‘원리들의 가장 확실한 범례이며 모든 학문들 중에 가장 고결한 황태자(certissimus principiorum index & amplissima scientiarum omnium princeps)’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폴라누스 입장인데, 그는 신학을 ‘가장 고결하고 신적이고 인간적인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유지되는 근원들에 대한 가장 완전한 앎(rerum alsissimarum, divinarum & humanarum, causarumque quibus illae continentur, cognitio perfectissima)’를 의미하는 지혜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학을 하나님의 지혜로 규정하는 전통은 중세에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아퀴나스 및 스코투스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지혜의 대상으로 신적인 것들이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과, 하나님을 가리키는 모든 것들과, 그로부터 온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과,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와 행하신 일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학을 지혜로 규정하는 폴라누스 입장의 근거는 바울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소명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일꾼이 된 이유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풍성함을 이방 속족에게 증거하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여 교회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 및 권세들조차 ‘하나님의 각종 지혜(ἡ πολυποίκιλος σοφία τοῦ θεοῦ)’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 중에 최고의 신학자라 불러도 좋을 바울이 일생의 소명을 하나님의 다차원적 지혜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우리의 생명조차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신학에 뛰어든 우리들도 마땅히 하나님의 지혜 증거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김이 옳습니다.

이에 더하여 하이다누스(Abraham Heidanus) 입장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신학을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신적인 것들을 가르치는 것(doctrina rerum divinarum)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이해에 따른 올바른 하나님 경배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지, 지식, 분별, 지혜, 기술을 모두 신학의 유용한 개념으로 여겨 포괄하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신학이 하나님의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신적인 성격 때문에 일대일 대응은 불가하고 지나친 확대나 과장만 피한다면 신학을 기술들 중의 기술(ars artium), 혹은 지식들 중의 지식(scientia scientiarum) 등과 같은 개념으로 표상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전에 저는 신학을 전인격의 활동이라 했습니다. 그 근거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짐이 없이 우리의 전부가 투입되지 않으면 안되듯이 신학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적인 계시에 의존하되 우리의 모든 지성과 이해와 분별과 지혜와 기술과 감성과 직관까지 그 계시된 진리를 수종 드는 도구로 동원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신학의 개념을 규정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지혜로운 속성과 바울의 신적인 지혜 중심적인 소명에 근거하여 신학의 뿌리를 가능한 한 하나님 자신과 성경에 두고자 하였던 폴라누스 정신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우리가 다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말아야 할 모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비록 신론적 근거를 가지고 신학을 '하나님의 지혜'로 표상한다 할지라도 언어의 분할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인간적 인식의 독특한 한계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우리에겐 여전히 신학을 특정한 언어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방해물이 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신학을 지혜로 규정함에 있어서 언어적 표상에 너무나도 매여서 성경이 의도하는 ' 신적인 지혜'의 전인격적, 전역사적, 전우주적 포괄성을 놓친다면 대단히 화려하고 무섭도록 장엄한 수식어를 동원한 신학의 어떠한 개념도 언어 '놀이'의 희생물이 된다는 사실, 꼬옥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아무래도 폴라누스 전공자라 모든 신학적 논의에서 상당부분 그의 신학을 편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부족하야 그런 줄 아시고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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