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추구된 모든 역사와 문명과 지식은 어떠한 방식을 따라 어떠한 주제와 영역을 대상으로 삼아 취득된 것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며 인간성이 투영된 인간의 배설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와 섭리가 그 배후에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살고 인간이 행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지각하고 표상하고 안다는 인간 편에서의 관점을 따라 본다면, 모든 것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번역되어 인간화된 것이기에 그것을 인간의 배설물로 여긴다는 표현은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의 본성을 바르게 이해하면 그에 의해서 산출되고 축적된 모든 지식과 문명은 비록 편차는 있겠으나 큰 울타리 안에서는 대략적인 이해와 예측이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알되 그 본성과 근원과 목적과 원리와 질서와 방식을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피조물 안에서 그 원인이 발견될 수 없도록 말씀의 명하시는 방식을 따라 만물을 지으셨고 하나님의 존재나 개입이 없이는 피조물 자체가 스스로 존재하고 살고 활동하며 생각하고 지각할 수 없도록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지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모든 독립성은 여전히 피조된 독립성일 뿐입니다. 인간은 분명 자유롭고 인간은 존엄하며 인간은 고귀하나 그 모든 것들은 피조된 자유이며 피조된 존엄이며 피조된 고귀함일 뿐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유롭고 존엄하며 고귀할 수 있다는 그런 근원적 독립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물었을 때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אֶֽהְיֶ֖ה אֲשֶׁ֣ר אֶֽהְיֶ֑ה)’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본성과 근원과 목적과 원리와 방식이 모두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스스로 자유롭고 스스로 존귀하며 스스로 완벽하며 스스로 무한하며 스스로 불변하며 스스로 지각하며 스스로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임의로 규정할 수 없고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영광이나 위엄을 첨삭할 수 없고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통치와 섭리를 변경하는 원인이 될 수 없으며 그 어떠한 상황도 하나님의 속성을 가감할 수 없도록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독립적인 존재라는 선언은 하나님 자신을 묘사하는 최적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독립적인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한 말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독립적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죄일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한 독립은 아니며 존재성을 떠받치고 인간의 행위 자체가 가능할 수 있도록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속에서 독립적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독립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독립은 인간의 본래적인 질서와 본분을 이탈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생략한 인간적 관점에서 본다면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엉터리 헛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우리의 지각이나 판단과는 무관하게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있다는 근원적인 죄에도 불구하고 진멸되지 않고 있으니까 그 심각한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인간이 문제일 뿐입니다.
모든 선과 모든 진리와 모든 지혜와 모든 거룩과 모든 영광과 모든 기쁨과 모든 소망과 모든 가치와 모든 생명과 모든 뜻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독립되는 순간 인간은 피조적인 의존성을 가진 인간의 본성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해지는 것이며 당연히 그 결과로서 인간은 가장 무서운 저주와 불행과 고통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대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과 그 결과를 설명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렘2:19)’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인간의 신 의존적인 본성과 존재의 근원과 삶의 원천 및 목적과 인간의 존엄성 및 가치를 송두리째 내던지는 우매이며 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지자가 여호와 버림의 보다 은밀하고 본질적인 성격으로 지목한 하나님 경외함의 부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눈에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마음에 즐거움을 주는 어떠한 것도 막지 않고 취하고 경험하고 누렸던 전도자는 인생의 본질 혹은 인간성 자체를 간파하고 이런 결론을 짓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라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전12:13).’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의 히브리어 원문(כָּל־הָאָדָֽם)은 ‘온 인류,’ ‘모든 사람,’ ‘전 인간,’ ‘인간의 총화,’ 혹은 ‘인간성 전체’ 정도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온 인류가 인간이길 포기하는 것이며, 인간성 전체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도록 훼손되는 것이며,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모두가 그런 인간성 전체의 상실이란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이기에 선지자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을 버리는 은밀한 형태로서 경외함의 부재는 그 자체가 이미 ‘악이요 고통’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결론에서 언급된 ‘그의 명령들을 지키라’는 부분도 인간성의 핵심적인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로서 고백한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다(시148:5)’는 구절은 명령과 피조물의 존재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암시된 연관성은 전도자의 결론부에 그 실상이 선명하게 묘사된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인간성의 본질은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직결되어 있으며, 당연히 그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인간이길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며 그것이 또한 원래 피조된 인간성 자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을 향하여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에서 존재를 부르시고 존재하게 된 피조물과 존재케 한 창조주 사이의 질적인 간격 때문에 ‘즉명적인(imperative)’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창조된 본성을 뒤집어 언어의 방식으로 번역한 것이며, 당연히 그 명령은 인간의 본래적인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서 지금의 타락한 인간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문제가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떻게 돌이키고 회복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아담 이후에 인간이 처한 실상을 죄로 규정하고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죄를 죄로 알지 못하며 율법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성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죄의 뿌연 속임수를 제거하고 죄의 있는 그대로를 고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롬7:7-13).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롬3:20)’는 정죄의 기능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의 타락으로 초래된 온 인류의 죄와 부패는 전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본래의 인간성을 상실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상태의 심각성은 다시 예레미야 선지자가 증언하듯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나 그것을 능히 알 자가 없(렘17:9)’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다윗은 ‘숨은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19:12)’란 고백으로 하나님 외에는 인간의 허물을 깨닫고 벗어나게 할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지각과 판단과 행동을 주관하는 센터로서 마음이 이처럼 스스로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짓되고 부패해 있으며 그것을 인식조차 못하는 상태라면, 아무리 시청각적 기능을 높이고 확대하는 최첨단 수단들이 동원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며 귀로 들어도 알지 못하며 당연히 마음으로 생각한다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게 함으로 인간의 마음을 잠식한 거짓의 교활함과 무지의 캄캄함은 한 꺼풀도 제거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무지와 오류의 누더기를 벗으려는 노력은 무수한 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시도되어 왔습니다. 특별히 데카르트 같은 인물은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공리로 받아들인 것들의 불확실한 실상을 경험하고 모든 인간적인 가공물을 제거하기 위해 방법론적 회의, 즉 가능한 의심을 전부 동원해서 눈에 보이는 것도 착시일 수 있고 귀에 들리는 것도 환청일 수 있고 생각으로 안다고 여기는 것도 착각일 수 있다는 등 회의 자체를 진리 탐구의 방법으로 취하고서 그 여정을 떠난 분입니다. 그런 방법을 따라 그는 부인하고 부인하고 또 부인해서 결코 부인할 수 없고 의심할 수도 없는 것을 철학의 출발점에 해당되는 공리로 삼습니다. 그 공리는 바로 내 생각이 옳든 그르든 좋든 나쁘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도 의심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명제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Cogito는 Cogitare의 1인칭 단수인데, 결론으로 나의 존재성이 명명되기 이전 Cogito 안에 ‘나’라는 주체가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모든 오류 및 거짓 가능성을 제거하고 또 제거해도 그 객관성을 허무는 마지막 인자로서 ‘나’라고 하는 주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는 단적인 예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유하는 주체로서 나 자신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즉 우리의 인간성 자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객관성의 순도를 아무리 높여도 여전히 상대적인 객관성을 과장하는 자위적 객관성일 뿐입니다. 진리가 있는 그대로 보존되는 객관성 확보는 이처럼 어떤 학문, 어떤 대상, 어떤 방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주체로서 인간성 자체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은 실험을 통한 가시적 검증이 확보되면 그 결과가 진리인 것처럼 더 이상 묻지 않고 권위와 신뢰를 쏟아 붓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에게 유익이 예상되면 거짓을 동원하여 그 결과를 산출한다 할지라도 이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정직한 양심을 가지고는 도저히 진일보를 내디딜 수 없는 순간에도 그 경계선을 임의로 범하고 그것을 범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눈먼 존경과 박수를 부당하게 취합니다.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법칙이나 공식이나 규범은 모두 '아직은' 오류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잠정적인 ‘진리’로 간주되어 과도한 대접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것들 중에 대부분은 정교한 합리성 없이 논리적 비약을 잇는 인간의 직관에 의해서 저질러진 오류들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모든 사람들이 더 깊은 사색적 결과를 제시할 능력과 대안이 없어서 불가피한 동의의 모양을 획득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성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완전한 자기부인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인간성 자체의 구체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모든 시대에 문명의 변화와 무관하게 객관성을 허무는 마지막 인자로서 어떤 방식으로 문제가 되는지를 김영규 교수님의 연구에 기초해서 살펴보고 싶습니다. 가장 탁월하고 용이한 의사소통 수단은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지식을 생산하고 지식을 유통하고 지식을 활용하고 지식을 저장하는 수단으로 가장 높은 용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된 통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록 인간이 다양하고 다채로운 다차원적 배설물을 만들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인간적인 통일체를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의 첫 울음은 분절화가 일어나기 이전에 밖으로 터져 나온 단세포적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울음은 신생아의 존재성이 거기에 다 응축되어 있는 총체적인 행위지만 동시에 강약고저 및 음량과 음색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언어발달 단계의 시초로 분류되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습니다.
생리적인 필요가 발생하면 아기는 울음을 언어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표정과 행동도 그 필요의 방향을 따라 동일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즉 손과 눈과 몸의 움직임이 울음과 더불어 하나의 방향을 향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동일한 방향을 지향하는 다른 요소들이 생략되고 아기의 내적 존재성이 소리로만 출고될 때 그것을 우리는 언어적 현상이라 부릅니다. 그럼 언어가 생략되고 다른 요소로만 표상되는 경우도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겠으나, 언어적 기능을 다양한 선택의 우연적인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뾰족한 답변을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만 눈빛이나 행동과 같은 의사표시 수단들이 언어를 대신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기에 언어적 현상에만 본성의 배타적 고유성을 부여하는 것은 곤란해 보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언어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활동 가능성의 현실화를 매개하는 수단으로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진 다른 것이 없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와 맥을 같이하며 언어가 모든 혼난과 모순의 원흉이라 여겨 언어의 올바른 분석을 모든 문제의 해법으로 여겼던 사람은 비켄슈타인(Ludwig Wittgenstein)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철학으로 여겼으나 이상적인 구호로만 물려졌을 뿐 자신의 철학적 시도는 안타까운 실패로 끝납니다.
문제의 핵심은 언어의 분할화, 소리와 문자의 분할화 현상이 어떻게 발생하는 것이냐를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훗설(Edmund Husserl)은 그의 스승 브렌따노 개념, 즉 ‘인간에게 그리고 나에게 대해 존재하고 참된 모든 것들은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명의식 안에서 일어난다(Alles, was fur den Menschen, was fur mich ist und gilt, tut das im eigenen Bewuβtseinsleben)’는 개념에 착안하여 모든 의식은 ‘무엇의 대한 의식(Bewuβtsein von etwas)’이라 규정하고 언어의 분할화 이전에 의식의 분할화가 선행하고 있다는 입장을 펼칩니다. 이는 의식이 어떤 대상을 향하는 지향성이 있으며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의도적인 연관성 혹은 흐름이 언어적 분할화 현상의 원흉이란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훗설은 존재의 원리로서 ‘나는 생각한다(Cogito)’ 라는 데카르트 표현이 사실 ‘나는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Ich habe Bewuβtsein von etwas)’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경험적 의식이 현상학적 판단중지 방식으로 절대적 순수성에 이르렀을 때에 훗설은 그것을 모나드 개념과 같이 어떠한 것도 출입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의 체계(ein Zusammenhang absoluten Seins)’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시공간 속에서 요청되는 어떠한 전제도 주어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최고의 무전제적 객관성이 담보되는 세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지각의 의식적 활동에 지향성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훗설의 객관성 추구는 이미 지향성 자체가 치명적인 전제로 있기 때문에 의식적 지각의 객관성 붕괴를 초래하는 근원적인 원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설정된 방향이 있다면 비록 그 이후의 어떤 요소가 변경을 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이미 객관성을 떠난 것입니다. 게다가 언어사용 중지 상황을 설정하면 훗설의 논의는 뿌리가 근절된 공상으로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나아가 지향성의 방향을 좌우하는 요소로는 주의(Aufmerksamkeit), 두려움(Angst), 관심(Intereste) 등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러한 지향성 이전의 선행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지금도 실존주의 철학의 과제로 계속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발견되고 그것을 괄호로 묶어낸다 할지라도 인간의 객관성 추구는 여전히 극복되기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실 훗설의 지향성 개념은 어거스틴 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논하면서 그는 오류를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이유가 의지의 본성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의지는 ‘시상이 형성된 사물들 안에 안식하기 이전에는 지각이나 사유의 욕망을 휴지하지 않는다(nec sentiendi aut cogitandi appetitum nisi in his rebus unde visiones formantur adquiescens conlocat)’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본성을 가진 영혼의 의지는 우리의 지각들로 하여금 의지가 추구하는 대상을 향하게 만들고 우리의 시선을 그 대상 안으로 억류하기 때문에 때때로 ‘영혼의 지향성(animi intentio)’ 이름으로 불립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물들의 뚜렷한 상을 획득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의지가 안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판명성의 문제를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인간 편에서 판명해질 때까지 의지의 추구를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판명성은 희미하고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을 싫어하는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의 발로일 수 있겠으나 사물 편에서 보자면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사물의 본래적인 상태에 강요하는 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지향성과 판명성의 오류는 인식론에 대한 어거스틴 입장의 현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지와 의식의 단순한 오류 지적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만족하는 것은 의지의 종료이며 안식(finis et requies voluntatis)이라 말하면서 인간의 궁극적인 만족은 흔들리지 않고 불변하며 가장 탁월한 진리(inconcussa et incommutabili et excellentissima veritate) 자체이며 최고의 선(summum bonum)이신 하나님을 지향하고 그를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의 시도처럼 어거스틴 자신도 지향성의 원인으로 두려움과 욕망(metuendo et cupiendo)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 관점에서 보자면, 객관성 파괴의 가장 치명적인 원흉으로 지목된 지향성과 판명성의 오류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며 결국 인간의 의지와 의식은 진리를 알고 판단하는 기관으로 주어진 주도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가 베푸신 모든 선물들을 누리는 수용적 수단으로 주어진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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