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5일 일요일

신학의 분류 5: 그리스도 지체들의 신학 (theologia membrorum christi)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그리스도 신학 이후에 그의 지체들이 다루는 신학을 논하되 이를 다시 천상적인 지체들과 나그네 지체들의 신학(theologia beatorum vel viatorum)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천상적인 지체들의 신학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 지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교통된 것으로서 하나님을 명확하게 바라봄과 그에 대한 직관적 지식의 방식으로 주어진 신령한 것들에 대한 지혜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천상적인 지체들은 다시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천상적인 천사들의 신학은 천사에게 교통된 신령한 것들에 대한 지혜로서 하나님과 그의 신비를 아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은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는다’고 말합니다.

천상적인 성도들의 신학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교통된 신령한 것들에 대한 지혜로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de facie ad faciem) 하나님의 계신 그대로(sicut est)를 분명하게 보는 지혜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은 마치 신성과 인성의 본성적 연합을 통해 성자가 하나님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처럼, 혹은 천사들이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천상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비록 천상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얼굴을 대면하여 본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늘에 속한 피조된 본성과 지각을 따라 가지는 창조자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 실체 그대로가 그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학, 천사들의 신학, 하늘 성도들의 신학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방식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당사자의 본성과 지위의 차이에도 기인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도, 천사들, 하늘 성도들의 신학이 죄악의 개입이 없다는 공통성을 가지지만 그리스도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며, 천사들은 하나님이 아니고 비록 하늘에 있는 이성적인 존재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는 못하고 몸도 없는 존재이며, 하늘의 의인들은 하나님이 아니고 천사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독특한 지위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 주체들의 신학은 결코 동일할 수 없습니다. 유니우스 개념에 따르면, 그리스도 신학은 그 자체로부터 본래적으로 (a se & in se) 영원하고 완전하나 하늘 성도들의 신학은 선행적인 그리스도 신학에 의존하여 온전한 것이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 신학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지식의 대상과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것입니다. 이는 또한 단순히 지식의 분량과 관계된 정도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 자체에서 비롯된 질적인 정도의 차이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들은 종교 개혁자들 문헌에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것이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이 중세 문헌들, 특별히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비엘(Gabriel Biel)의 글들을 읽으면서 도출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구분을 채용하고 재구성한 것은 중세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하나라도 침묵으로 그냥 지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며 우리가 수행하는 우리의 신학 현주소를 정직하고 겸허하게 깨닫고 인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처한 믿음의 현주소를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및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을 심판하는 하나님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히12:21-23)’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속에서의 문맥적 의미는 약간 다르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땅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과 지식이 그리스도 예수와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의인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론에 비추어 우리의 신학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도 신학과 하늘에 있는 의인들의 신학을 생략하고 눈에 보이는 땅의 것들에 기초하여 신학을 펼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경박하고 위험한 일인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학은 그리스도 예수처럼 본성적 연합의 방식이나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의인들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이 나타내신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계시의 신학(theologia revelationis)’이라 불리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거주할 자가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천성을 향한 도상에서 나그네의 신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신학은 ‘나그네의 신학(theologia in via, theologia viatorum)’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연 혹은 은혜의 계시를 통하여 교통된 신령한 것들에 대한 지혜(theologia nostra est sapientia rerum divinarum, revelatione per spiritum Dei communicata naturae huius aut gratiae beneficio cumiis qui in terra degunt)’라는 유니우스 개념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계시 방식들 중의 하나로서 자연의 계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통해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능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피조물과 우리의 본성이 합력하여 빚어낸 하나님 지식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산출된 신학을 ‘자연적인 신학(theologia naturalis)’이라 했습니다. 은혜의 계시 방식은 창조시 우리에게 부여된 본성 및 피조물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의한 초자연적 계시이며, 이는 우리의 본성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배제되는 것도 아니며 그 모든 것들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초자연적 계시의 방식을 따라 산출된 신학을 우리는 ‘초자연적 신학(theologia supernaturalis)’이라 부릅니다.

계시의 방식을 따라 구분된 두 신학의 관계성에 대해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하나님 자신만이 자연과 은혜의 동일한 저자(idem auctor)시며 동일한 목적(idem finim)을 지향하기 때문에 참된 자연적 신학과 초자연적 신학은 어떠한 면에서도 충돌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습니다. 인간적인 이성의 판단을 따라 자연과 초자연을 임의로 구분한 것에 근거하여 두 신학의 충돌을 주장하는 것은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 자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오늘날의 과학이 다루고 있는 극미시 세계 및 극거시 세계의 파악할 수 없고 형설할 수도 없는 신비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만 있어도 오해의 본질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어 보입니다.

자연적 신학과 초자연적 신학 사이에 마찰음이 생기는 이유는 죄의 세상 안으로의 개입에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초자연적 계시도 개입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른 자들에게 자연적인 계시는 무의미해 졌습니다. 물론 죄로 인하여 자연의 외관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자연의 근본은 변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 자연적 계시를 수용하는 주체인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본성의 타락 때문에 지금도 자연의 입술에서 동일하게 증거되는 하나님 지식을 아는 자도 없고 추구하는 자도 없으며 당연히 감사치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죄의 개입으로 뒤틀어진 자연적 신학의 회복은 자연을 타락이전 상태로 돌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자연적 신학의 회복은 이미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인간의 영혼을 은혜의 방식으로 되살리는 것과 그들에게 (서로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창조와 섭리와 종말의 실상과 그 모든 것들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계시의 방식으로 알리시되 또 다시 외적인 관찰에만 의존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보다 정교하고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말씀의 기록된 계시를 주시고 동시에 그 말씀을 수용하는 인간이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 스스로 깨닫는 방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방식으로 하나님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있습니다. 초자연적 신학은 자연적 신학의 회복이요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정립된 초자연적 신학의 샬피우스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의 상태에서 초자연적 신학은 기록된 말씀에서 계시되고 규정된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지신 하나님에 관한 지혜(theologia supernaturalis est sapientia, Dei in Christo agnoscendi, quae vtraque in verbo scripto reuelatur, & sic definitur)’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하나님에 의해 감동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선포된 말씀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종들에게 위탁된 것으로서 신약과 구약 속에서 이해된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구원에 기여하는 것(secundum veritatem Dei, a Deo inspirata, & per enunciatiuum sermonem in Christo Dei seruis commissa; in libris Veteris & Noui Testamenti comprehensa, quatenus expedit ad gloriam Dei, & Ecclesiae salutem)’입니다.

폴라누스 개념도 이와 동일하나 그는 나그네 신학의 보다 정교한 울타리를 다음과 같이 그려주고 있습니다. 즉 ‘인간주체 개개인 안에서 사려된 나그네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생에 거하는 자들에게 교통된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혜로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 사려된 것(sapientia rerum divinarum cum hominibus in hac vita versantibus communicata a Deo per verbum, pro ratione eorum hominum quibus inest modificata)’이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의인들의 신학에 비한다면 ‘애매하고 불완전한 신학(theologia obscura et imperfecta)’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완전과 애매함은 성경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에 기초하여 신학을 전개하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과 신학을 동일시한 오웬의 특이한 주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는 알렉산드리아 필로(Philo of Alexandria)에 의해 처음으로 체계화된 내제적 말씀(λόγος ἐνδιάθετος)과 선포된 말씀(προφορικός) 및 기록되지 않은 말씀(ἄγραφον)과 기록된 말씀(ἔγγραφος) 사이의 구분을 언급한 이후에 ‘기록된 형태로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말씀, 즉 이 성경이 바로 우리의 신학(omne Dei verbum quodcunque scriptis commissum est, scriptura ista ita est nostra theologia)’이라 했습니다. 이는 신학에 있어서 성경의 필연성과 절대성을 주장하고 전통의 상대적인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성경 자체와 성경에 기초한 우리의 신학 사이를 구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분의 이유는 성경의 완전한 진리성을 우리의 신학에 부여하고 우리의 신학적 오류와 불완전을 성경에 돌리는 우를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학’은 신적인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 외적인 것을 건드리는 순간 부패할 수밖에 없으며, 성령의 조명을 무시하고 인간의 이성 자체를 진리의 산출자요 종결자로 여기며 계시도 이성의 판별을 따라 비로소 계시일 수 있는 규범성을 그 이성에게 부여하는 순간 신학이길 포기하고 인간학의 범주로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하나님 지식은 은혜로 주어진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오직 예수님이 아시고 보여주신 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의인들이 얼굴을 대면하는 방식으로 아는 하나님 지식에 비하여 부족하고 제한적인 하나님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겸손의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 자신의 옳음을 입증하고 타인의 오류를 정죄하며 성경 자체보다 그것에서 파생된 신학을 절대적인 규범의 자리까지 높이려는 어떠한 의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거짓된 ‘신학’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도록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신학들이 이곳 저곳에서 배설한 추악하고 교활한 오류들을 예리한 면도날로 도려내듯 한 치의 남김도 없이 간파하고 제거할 수 있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학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절대적인 진리를 포기하게 하고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흐릿한 비유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도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고 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는다(마13:34)는 문맥에서 가라지 비유를 언급하며, 가라지의 출현은 원수들이 한 것이며 이에 우리의 반응에 대해서는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가 된다고 하십니다(마13:29). 신학의 칼은 언제 뽑으며 어디까지 휘둘러야 하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의 신학은 본질적인 면에서는 하나지만 크고 작은 다양성을 고려하면 택자들의 수보다 다양하고 많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라지’에 해당되는 ‘악한 자의 아들들’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한 인물이 ‘천국의 아들’과 ‘악한 자의 아들’로 선명하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의의 아들들 중에서도 신학적 가라지가 있고 악의 아들들 중에서 무조건 버릴 수는 없는 성경적 진리의 조각들을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에 그들 개개인의 신학을 살피되 그 안에서도 취하고 버릴 구체적인 내용들을 예리하게 분별하며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진리 자체를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으로 분리할 수는 없겠으나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얻게 하는 구원의 진리와 그것과는 직접 관련되어 있지 않은 하나님의 진리 사이는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구분도 경계선이 엄밀하고 뚜렷한 것이 아니라 대략적인 것입니다. 구원적 진리는, 이를 테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시적인 교회의 제도적 형태가 장로교의 모습 혹은 회중주의 모습 혹은 감독주의 모습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구원에 직접 관련된 지식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제도적 부패가 역사 속에서 구원에 이르는 진리 지식을 훼방하고 질식시킨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진리 지식에 대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식 만큼의 비중과 엄밀성을 부여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다르고 다양한 신학을 가라지 제거하듯 무분별한 비판과 정죄로 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적 오류를 불가피한 다양성 때문에 묵과하는 것도 최선의 방책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학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신학을 최종적인 형태로 추구하고 이미 하늘에 도달한 의인들이 가진 온전한 인간적 신학을 지향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하나님 지식의 방식으로 성경의 기록된 계시에 온전히 뿌리를 두되 변론과 정죄의 방식으로 가라지를 축출하는 것보다는 최고의 신학을 타인에게 본 보이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몰래 침투한 가라지의 정체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최고의 엄밀성을 가지고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이러한 태도는 때때로 타협적인 것처럼 보이고 비겁해 보이고 나약해 보이고 때때로는 위험하고 억울하고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길을 가는 것이 신학자의 ‘십자가’일 것입니다.

상대방을 ‘죽일 놈이야, 온통 거짓이야, 교회에 얼씬도 못하게 해야 돼, 이단이야, 세속에 물들었어’ 등의 언사로 불온한 딱지를 붙인다면, 비록 자신은 그 반대적인 이미지의 소유자인 것처럼 대외적 이미지 관리의 야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그의 걸어가신 길과 우리로 걷기를 원하시는 ‘신학적 십자가의 길’은 모두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하늘의 무수한 천사들을 풀어서 엄밀한 신학적 잣대과 저울추를 들이대며 함량 미달의 가라지를 모조리 제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진리 되심을 입증하지 않으시고, 고작 호신용 칼을 뽑아든 베드로도 말리시며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26:52)’는 책망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냐(요18:11)’는 결의로 우리를 교훈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비겁한 침묵으로 진리의 유린을 방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동원하되 자신의 생명까지 던지는 방식으로 진리의 전인격적 증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주님을 따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양심과 언어와 행실이 모두 동원된 입체적인 신학으로 본을 보이되 억울한 손해도 감수하는 십자가의 방식으로 신학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