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5일 일요일

신학의 분류 3: archetypa et ectypa theologia


요한복음 17장에서 요한은 영원한 생명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앎의 주체를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들’이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을 계신 그대로 아는 차원까지 요구하지 않고 우리가 아는 피조물 지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고, 그럼 하나님 스스로의 지식과 인간의 피조물적 지식은 어떤 관계를 갖느냐는 물음을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너무나도 오묘해서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그 지식의 끝자락에 결코 도달할 수 없기에 바울은 고작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는 경탄을 쏟아내며 하나님 지식은 물론이고 만물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 감이라’는 고백으로 만물의 어떠한 지식도 처음과 나중이 하나님께 속한 지식의 무한한 차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본격적인 교리들을 논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해서 신학을 원형적인 신학(theologia archetypa)과 모형적인 신학(theologia ectypa), 즉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를 아는 지식과 피조물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구분하는 일을 했습니다. 개혁주의 교의학 체계 속에 이런 구분을 도입한 최초의 문헌은 아마도 유니우스 책 『진정한 신학에 대하여(De vera theologia, 1594)』일 것입니다. 물론 이 구분도 정통주의 시대의 발명품이 아니라 이와 유사한 구분으로 하나님의 자기신학(theologia in se)-우리의 신학(theologia nostra) 같은 선행적인 스코투스 구분의 발전과 체계화일 뿐입니다. 원형신한-모형신학 구분은 유니우스 이후로, 폴라누스, 샬피우스, 왈레우스, 하이다누스 같은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교의학 속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구분인데, 주로 하나님의 신성을 인간이 어디까지 알 수 있느냐와 관련해서 인간의 지적 한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적응적 계시가 인간의 피조물적 지식과 하나님 자신의 신적인 지식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에 대해 어떠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지와 관련해서 그 구분이 활용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원형신학-모형신학 구분에 있어서도 저는 개혁파 정통주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폴라누스 진술을 근거로 이 구분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는 먼저 참 신학이 원형적인 것이거나 모형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형은 참되고 모형은 참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참된 신학에 속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형신학-모형신학 구분에서 두 신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 관계성을 유비적(analogica)이라고 했습니다. 원형적인 신학은 ‘신적인 것들에 대해 형성되지 않고 그 자체로 본질적인 하나님 안에서의 지혜(Sapientia rerum divinarum, in Deo residens, essentialis ipsi & increata)’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형적 신학은 모든 신학의 첫번째 형태(typus primus)이고 유일하게 본래적인 범례(exemplar primigenium)라는 의미에서 theologia prototypa라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원형신학 개념도 사색의 결과로서 정통주의 시대에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 20BC-50AD)는 하나님이 이성적인 본성의 원형(archtypum rationalis naturae)이며 인간은 그것의 참된 형상이요 모형(vero imago & effigies)이라 했으며, 폴라누스 경우에도 이 필로의 개념을 따라 하나님을 ‘첫번째 신학자요, 최고의 신학자며, 가장 완전한 신학자(primus, optimus et perfectissimus Theologus)’로 명명했던 것입니다.

원형적인 신학은 인간에게 속한 신학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는 것처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아는 것처럼 알 수 없기 때문에 원형적 신학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속한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지식의 대상이 하나님 자신일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며 하나님이 자연을 아시는 것처럼 자연을 알지 못합니다. 어떠한 지식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바라보고 알고 의도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보시고 아시고 의도하신 목적과는 다른 것입니다. 원형신학-모형신학 구분은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신적인 섭리 전반에 있어서 하나님은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다’고 하십니다(이사야 55:8). 신명기 29장 29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이 있지만 오묘한 것들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가려져 있고 하나님께 고유하게 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알려지고 알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이 아시는 것의 차이가 가장 잘 묘사된 구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피조물적 지식을 하나님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지식과 구별하는 것이 성경적인 요청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의 기록에서 우리는 비록 질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원형적인 지식과 맞먹을 수 없지만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은 것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우리가 알도록 계시된 것도 당연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인간의 유한한 지식을 무작정 그 원형적 지식과 무관한 거짓으로 간주할 수는 없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인간의 참된 모형적 신학이 하나님의 무한한 원형적 신학에 의존하고 있는 모형 혹은 투사이기 때문에 참되다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한계 속에서 추구할 수 있도록 주어진 모형적 신학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섭리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한에서 원형적 신학의 진리가 보존될 수 있고 거짓과 구별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형적인 신학은 다시 하나님 자신 안에서(in se) 사려된 것과 합리적인 피조물 안에서(in creaturis rationalibus) 사려된 것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합리적 피조물 안에서 사려된 모형적 신학은 또 다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에 따른 신학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속한 지체들의 신학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지체들의 신학을 다시 하늘에 속한 축복된 성도들의 신학(beatorum)과 땅에서의 나그네 신학(viatorum)으로 구분하되 전자는 하늘에서 천사들의 신학과 성도들의 신학으로 구분되고, 계시의 영감된 신학으로 불리는 후자는 절대적인 관점에서(absolute) 사려된 신학과 상대적인 관점에서(secundum quid) 사려된 신학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관점을 따라 사려된 나그네 신학은 본질상(secundum naturam suam) 하나이고 영원하며 불변한 것이고, 부수적인 경륜을 따라서(secundum adjuncta) 옛 것(vetus)과 새 것(nova)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관점을 따라 사려된 나그네 신학 혹은 우리의 신학(theologia viatorum seu nostra)은 유효적 원인들에 따라 우리에게 주입된 부분(infusa)과 취득된 부분(acquisita)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그네 신학은 그 근원에 따라 ‘자연적 신학’과 ‘초자연적 신학’으로 나뉘는데, 이는 계시적인 신학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함이며, 그것이 없이는 결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의 강조를 위한 것입니다. 이 구분도 지적 공백에서 비로소 산출된 것이 아니라 리차드 멀러(Richard Muller)가 잘 지적한 것처럼 이미 오캄(William Ockham, 1287-1347)이 강조한 ‘우리의 현 상태에서 추구 가능한 우리의 신학(theologia nostra nobis possibilis pro statu isto)’과 ‘나그네의 지성에서 신적인 능력을 따라 추구 가능한 신학(theologia possibilis per divinam potentiam in intellectu viatoris) 구분의 유사한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 신학의 탁월한 원리는 인간의 이성과 이해를 초월한 것으로서 신적인 계시와 영감과 확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적 신학은 인간의 지성적인 활동을 통해 자연적 근거에서 산출된 것으로서 신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그런 자연의 빛(lumen naturalis)으로 포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인지하는 신학을 말합니다. 엄밀하고 고유한 의미에서 본다면 결코 ‘신학’일 수 없지만 정통주의 시대에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신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에 뿌리를 둔 계시적 신학의 전제 혹은 원리가 된다거나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대립항의 지위까지 가짓 것처럼 자연적인 신학에 과도한 의미와 신뢰를 부여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 신학에는 신학의 정의에 해당하는 ‘지혜(sapientia)’라는 용어조차 붙이기를 꺼려 했으며, 이런 맥락에서 참된 철학(philosophia vera)과 동일시 하는 정도로만 존중해 준 것 같습니다.

신학의 주입된 부분과 취득된 부분의 구분에서 우리의 신학의 유효하고 가깝고 즉각적인 원인(causa efficiens proxima ac immediata)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이 본질적인 면에서는(substantia) 고유하고 단순하며 계시의 방식을 따라서는(revelationis modo)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종의 책인데 내적인 말씀은 마음의 책이며 외적인 말씀은 신구약 성경이라 했습니다. 마음의 책이란 인간의 성정이나 양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조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하이데거는 내적인 말씀을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개별적인 영감을 의미하며 외적인 말씀은 성경을 의미하며 이는 그 영감을 그들의 입술로 증거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분에 근거하여 카톨릭 학자들은 기록된 말씀과 기록되지 않은 말씀을 구분하여 두 말씀을 서로 독립적인 두 종류의 말씀으로 분리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비록 내적인 말씀이 주도적인 성격(principale)을 가졌고 외적인 말씀이 도구적인 성격(instrumentale)을 가졌으나 그 두 형태의 말씀은 본질상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구속적 믿음의 내용들(fides salvifica) 중에 유일하게 외적인 말씀으로 성경과 유일하게 내적인 말씀으로 성령의 조명에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원형신학-모형신학 구분은 단순한 지적 유희의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이생에서 가장 고상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믿음의 선배들이 지성과 감성과 열정을 다 쏟으며 보다 깊고 보다 정교하고 보다 성경적인 하나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는 터질듯한 열망과 고뇌의 누적된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보이고 들리는 파장의 번역을 통해서만 사물을 인지하는 인간이 어떻게 어떠한 물질로도 심지어 빛으로도 번역될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게다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되고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고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순전한 진리를 알 수 있을까요? ‘우리에겐 유일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서 성경이 있다’는 사실에 안주하고 만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추구하는 자로서 우리가 너무도 게으르고 무책임한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진리를 맡은 자들은 진리가 가진 속성의 차원까지 성실하고 정직하고 순전하고 거룩할 것을 요구받는 법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어쩌면 창조의 신비보다 더 오묘하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의 신비도 인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벗겨지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비추어 성경의 신비를 생각할 때, 문서와 활자의 형태로 하나님의 말씀이 번역되어 있다는 너무나도 기초적인 신비조차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을 우리가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창조는 세상의 형성과 그 이후의 섭리에 대한 것이지만, 성경은 그 모든 것들을 언어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게 하되 그 주체에 대한 지식까지 이르도록 훨씬 방대하고 깊고 종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적응된 책이지만 적응된 그 상태에 머물도록 의도된 책이 아니라 그 책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한하고 불변하신 진리의 높은 차원까지 이르도록 초청하는 그래서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정성과 성품과 뜻과 힘과 생명까지 다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책이라 한다면,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무리 믿음의 선배들이 정교하고 섬세한 구분법을 동원하여 해부하고 분석한들 그 말씀이 갖는 진리의 위엄에 걸맞은 만큼의 정당성을 가질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수학에는 무한과 유한이란 수개념이 있습니다. 물론 이 개념과 구분은 자연 자체에 내재된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무한수와 유한수의 구분으로 세상을 덮을 수 없었기에 인간은 자연의 보다 정교한 표상을 추구해 왔는데 지금 그 자연을 표상할 수 있는 그나마 가장 정교한 방법은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과 상식을 거절하는 허수의 도입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한 발짝씩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런 허수 의존적인 표상이 ‘접근’인지 아니면 ‘이탈’인지 보다 엄밀하게 검증해 볼 일이지만, 어쨌든 이것만 보더라도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는 바울의 근 2000년 전 통찰력에 학문의 DNA 역할을 감당하는 수학이 그 자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동의하고 만 셈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시공간의 옷을 입고 있는 ‘유한한’ 자연을 표상함에 있어서도 무한수 개념이 필요하고 실질적인 수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도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고 상상 속에서만 만들어진 것이라고 인정하는 허수(imaginary number) 개념까지 동원해야 그나마 인간이 유한한 것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수학보다 무딘 엄밀성을 추구하는 다른 모든 학문들과 인간의 상식이 얼마나 거대한 무지의 그늘에 덮여 있는지를 약간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들도 이러한 무지와 오류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저는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이 신학을 구분함에 있어서 저렇게 예리하고 엄격하고 정밀하고 정직하게 우리의 신학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과 경계선을 규정해 놓은 것을 보면서 우리의 신학함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의 덕을 떠나지 말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참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식을 영생이라 규정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긍휼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 자신의 지식도 아니며, 천사들의 지식도 아니며, 하늘에 있는 의인들의 지식도 아니며, 그리스도 예수의 지식도 아니며, 계시로 주어진 성경이라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지식을 가진 것도 아니며, 겨우 인간의 거짓되고 부패하고 유한한 상태 속에서 각자에게 부여된 한 줌의 능력을 따라 심각한 기복을 보이는 불안하고 혼탁하고 불분명한 그런 지식일 뿐인데도 그 변변찮은 지식조차 하나님 아는 지식으로 간주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와 긍휼 속에서 진멸되지 않고 있는지를 믿는다면 어떠한 지적 경지에 오른다 할지라도 겸손의 무릎을 펴서는 안된다는 당위성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식이 우리를 교만케 하는 것은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순간에 참으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도 모르는 가장 사실적인 우리의 지적 빈곤과 비참을 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학의 가방끈이 아무리 길더라도, 다양한 언어와 시대와 분파와 인물을 아무리 많이 알더라도, 수학과 철학과 심리학과 생물학과 물리학과 논리학과 법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 예술에 아무리 종합적인 전문가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런 인간의 본질적 상태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당연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는 전도자의 엄중한 교훈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했다’는 욥의 정직한 고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원형신학-모형신학 그리고 모형신학 내에서도 여러 세부적인 구분들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신학의 영역이 얼마나 소박한 범위에 제한되어 있는지를 살피면서, 비롯 우리의 신학이 거짓된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렵고 떨어야 하는 예배자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는 겸손의 산 증인들로 발견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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