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특별히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모든 가르침을 사물(res)과 기호(signa)로 분류하고 사물은 기호를 통해서 배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기호는 말(verba)이라고 했습니다. 사물들 중에는 엄밀한 기준을 적용할 때에 사물이 아니라 기호의 성격을 가진 사물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것들이 사용되는 것(uti)인지 즐기는 것(frui)인지의 차이를 따라 구분할 수 있는데, 사용의 대상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으로 사용되는 사물들을 일컫는 말이고, 즐김의 대상이란 다른 어떠한 것들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사물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렇게 구분한 이후에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만이 엄밀한 의미의 유일한 사물이요 즐김의 대상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런 궁극적인 즐김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기호이며 사용의 대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어거스틴 견해를 보다 섬세하게 발전시켜, 하나님을 즐기는 신학의 부수적인 목적은 모든 악한 것에서의 자유(libertas a malis omnibus)와 모든 참되고 선한 것들의 소유(possessio verorum bonorum omnium)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후자는 다시 하나님을 보는 것(visio Dei), 하나님과 합치되는 것(conformitas cum Deo), 하나님 안에서의 충족(sufficientia in Deo), 그의 영원한 복에 대한 확실한 지식(certa scientia aeternae suae felicitatis)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중세를 비롯하여 현대의 신학적 경향은 영성의 최고봉을 가리키는 말로 Visio Dei와 Conformitas cum Deo라는 표현들을 취하는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안에서는 그것이 신학의 부수적인 목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참된 영성은 교회와 신학에서 분리된 어떤 득도의 차별화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시야에 신비로운 가시적 현상이 펼쳐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 현세의 삶에서도 역동할 수 있도록 성령의 초자연적 빛으로 조명을 받아 우리 마음에 얻어진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지식(cognitio)을 뜻하는 것입니다. 눈은 가시적인 것을 보지만 마음은 비가시적 실체를 보는 내면의 눈입니다. 이는 마음이 보는 능력을 발휘하는 어떤 주도적인 주체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외적 조명을 필요로 하는 기관이란 의미에서 눈입니다. 캄캄하면 눈이 있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기에 눈은 빛 의존적인 기관이듯 마음도 애초부터 성령의 빛 의존적인 수동적 기관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봄이 없이는 복되게 살아갈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당연히 이런 마음의 보는 기능과 무관하게 눈의 역할을 과장해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마치 가시적인 눈에 빛으로 번역된 하나님의 어떤 형체가 포착되는 것으로 여겨 몽롱한 상태를 조장하여 착시를 일으키는 어떠한 현대적 시도들도 무지와 정욕의 광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지각하는 가장 완전한 행위(actio perfecta)로서 하나님을 보되 형언할 수 없도록 명료하고 완전한 차원까지 마치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듯이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혼 안에서만(in Christi anima)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관련하여 개혁주의 인물들은 성자가 신성을 따라서는 신성 전체를 보되 완전하게 보지만(videt totam & totaliter), 그리스도의 영혼은 비록 신성 전체(totam)를 보기는 하지만 완전하게(totaliter) 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성은 그 자체 안에서(in seipsa) 모든 것들을 보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것들만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들까지 단순하게(simpliciter) 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혼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들을 보되 신성 안에서(in deitate)만 볼 수 있습니다. 신성은 자체 안에서 창조되지 않은 빛을 따라 자체의 무한한 실체와 모든 무한한 것들을 분명하고 단순하게 보지만 그리스도의 영혼은 창조된 빛을 따라 유한한 것들을 명료하게 본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의 경우에도 하나님을 보는 것은 최상의 복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에 근거하여, 정통주의 학자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들이 천사들 안에서는 항상 명료한 일이지만(semper clara), 하나님의 실체 전부를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라(non sane totam)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무한이 유한을 다 담을 수는 없는 탓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명확한 것과 불명확한 것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는 것은 몸을 떠나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성도들 및 부활 이후의 상태에 들어갔을 때의 인간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살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하나님을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인간이 유한한 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며 거울을 보듯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보는 방법론적 한계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믿음으로 보는 하나님이 불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것도 아니고 전부를 보는 것도 아니기에 ‘희미하게 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합치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지혜와 의와 거룩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similis)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충족’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며 안식하며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들도 구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가 자기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복이라(시33:12)는 시편 기자의 고백은 하나님 안에서의 충족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복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란 신적인 복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그 영원한 복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까지 인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상에서 논한 것처럼 최상의 복이라는 것은 마음에 속한 복이기 때문에 영적인 것이며,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을 즐기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기에 거룩하며, 영적이고 거룩한 복이기에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된 교회에 가장 적합한 복인 것입니다. 그런 복만이 유일하게 참되며 견고하며 영원한 복입니다. 이러한 복의 도구적인 원인은 구원적인 믿음(fides salvifica)이며, 어떤 사람이 복되다는 사실의 불변적인 표징(signum)은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참된 교회의 지체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이 교회에 분배해 주시는 복의 수혜자가 되는 유효적 소명(efficax vocatio)이며, 둘째는 죄악을 피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선을 행하려는 열정(studium)이며, 셋째는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시는 징계였고 진리를 위해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던 믿음의 선배들이 동일하게 경험했던 십자가와 고난(crux & afflictio)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 하나님과 합치되는 것, 하나님 안에서의 충족을 복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복의 왜곡되고 무질서한 개념이 인간에게 잘못 체질화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는 교회다울 때가 최고의 복을 누리는 상태이며 세상에 가장 좋은 것들을 줄 수 있는 복의 근원이 되는 때입니다. 다른 것에 의해서 복이 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교회의 정의를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 했습니다. 교회의 부흥과 교회의 회복과 교회의 승리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 개개인과 교회의 진정한 복입니다.
그러나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여 구하지 말아야 할 저주를 복으로 알고 그 저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교회 밖에서 그런 사람들이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교회 안에서도 그런 저주스런 ‘복’을 추구하는 분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복이라는 것의 성경적 개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는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 편에서는 마땅히 구해야 할 대상이고 다른 것들은 구하지 말아야 할 경계선과 같은 것인데, 그 경계선의 무분별한 출입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범하는 자들이 특별히 교회의 리더십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단과 처방 모두에 있어서 어떤 해법을 기대하기 어려운 위경에 치달아 있는 교회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욕심이란 성경에 규정된 복을 구하지 않고 다른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진리의 빛에 교회의 현실을 비추어 본다면, 마땅히 구해야 할 복을 구하지 않고 구하지 말아야 할 것에 욕망의 군침을 흘리며 교회의 본분조차 남루한 흥정의 대상으로 맞바꾸는 교회가 필히 죄를 잉태하고 결국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추락하여 사람에게 밟히고 버려지는 것은 너무나도 뻔하고 끔직한 결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된 최상의 복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분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 복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이라는 확실한 지식이 또한 복입니다. 이러한 복의 수혜자로 부름을 받아 교회의 지체가 된 자들의 여정은 아프고 처절하며 때때로는 터무니 없이 억울한 십자가의 길일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고난의 길을 넘어서 나의 감성적인 기호를 외면하고 이성적인 가치의 익숙한 체계를 거절하며 늘 자기를 향하는 이기적인 반응의 기재까지 부인과 거듭남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음과 영혼의 죽음 같은 진통을 수반하는 길입니다. 바울처럼 심지어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조차 복이 아니라 해로 여기는 가치관의 본질적인 거듭남이 없이는 우리가 비록 성경이 요구하는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내면에는 계명의 요구와 옛사람의 가치 사이에 갈등이 잦아들지 않을 것이며, 늘 억울한 대우를 받았다는 피해의식 속에서 겉사람의 가치관 의존적인 보상을 화폐가치 기준으로 계산하게 될 것이며, 온전한 자발성 없이 십자가 희생의 가식적인 겉모양만 갖추게 될 것이며, 마음에 새겨지지 않고 여전히 밖에 머물러 있는 계명의 억압적인 강요에 눈치를 보는 식의 비자발적 순종을 겨우 연출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무엇을 복으로 추구하고 있는지를 엄중하게 물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배불러 있는 교회 찾기가 바다 모래에서 바늘을 찾는 격입니다. 세상이 목말라 사활을 걸고 취하기를 갈구하는 그러나 결국은 썩어 없어지는 것들에 동일한 갈증을 느끼며 욕망의 역한 악취를 복음의 향기인 듯 뿜어내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희생과 손해와 억울함과 헌신과 용서와 인내와 온유보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윤은 챙겨야 하고 억울함은 갑절로 보복해 주어야 하고 자신보다 타인의 헌신을 촉구하며 증오와 분노와 난폭함을 기독교의 진리 사수하는 수단으로 동원하는 것을 마땅한 일로 여기며 서로가 서로를 그런 세상적인 방향과 방법을 따라 격려하는 일들은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오른 뺨을 치면 상대방의 두 뺨을 다 후려 갈겨야 직성이 풀리는 교회의 낯 뜨거운 대응은 얼마나 빈번하게 재연되고 있습니까?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에 대하여 세상이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해도 사납고 무자비한 짐승으로 변하여 보복의 발톱을 드러내는 일이 어쩌면 그렇게 정당하고 마땅한 처신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까?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임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겐 원수라도 사랑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고 유일한 반응임을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시지 않습니까? 도대체 교회의 썩어 없어지는 유익 추구와 입장 관철을 위해 물리적인 힘과 머릿수 여론을 행사하는 버릇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교회가 그런 방식으로 아무리 크고 획기적인 유익을 획득한들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상실하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천하의 만국과 그 모든 영광을 얻는다고 한들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를 잃어 버린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사단은 호탕한 웃음으로 쾌재를 부를 일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그분과 멀어지며 그렇게 됨으로써 영원한 복에 대한 지식마저 상실하게 되는 저주의 어두운 그림자가 나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에 얼마나 짙게 드리워져 있는지를 진중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복 개념의 심각한 왜곡과 변질이 교회로 하여금 하늘에 소망을 둔 나그네의 희생적인 십자가의 길을 이탈하여 땅에 영원히 거할 땅의 사람처럼 이기적인 번영의 길을 추구하게 만든 이 고질적인 문제의 해법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온 생명을 다하여 보여주신 십자가를 붙드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 하나님과 합치되는 것, 영원한 복을 아는 이 모든 비밀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소멸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의 후사가 되게 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그 어떠한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주님과의 영원한 연합이 다 십자가에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들 때에 모든 것을 얻습니다.
허나 십자가를 버리면 이 모든 영적 비밀들을 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번영은 언제나 십자가를 기피하게 만듭니다. 땅의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지향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십자가가 자신의 머리를 박살내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승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빼앗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의 하나는 십자가가 복이거나 승리가 아니라 거북하고 식상한 퇴물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전략은 유럽과 북미에서 짭짤한 소득을 거두었고 아시아나 다른 제3세계에도 이미 그 검증된 은밀한 유혹이 전염병 같이 급속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가 증거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이미 그 유혹의 촉수에 찔려 중독된 상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깨어 나십시오. 예수님은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는 기독교적 삶의 유일한 길입니다. 십자가를 상실하면 죄에 대해서만 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마치 죽은 것처럼 안면몰수 태도의 끝모를 방자함을 중단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회복하여 전 세계 교회에 회복의 작은 불씨를 공급하는 우리 각 사람과 교회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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