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5일 일요일

신학의 분류 4: 그리스도 신학 (Theologia christi seu unionis)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성적인 피조물 안에서 사려된 모형적 신학은 하나님의 교회 머리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을 따른 신학과 그의 몸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사려된 신학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두 가지의 모형적인 신학은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말씀(골2:3)과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지혜(σοφία)가 되셨다’는 말씀(고전1:30)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신학(theologia christi)이 우리의 신학에 대해 원형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신학함에 있어서도 이르러야 할 기준이요 따라야 할 본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아시는 하나님 지식의 분량까지 이르러야 하고 그분이 추구하신 방식대로 하나님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보고 예수님이 들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듣고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우리도 동일하게 의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신학을 상고하기 이전에 그리스도 신학을 탐구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학과 관련된 가장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던 교회사적 이슈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문제일 것입니다. 교부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구절들(마태11:27, 요21:17)과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지식만을 가졌다는 구절들(막13:32, 눅2:52) 사이의 해석학적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전자는 신성에 따른 언급이며 후자는 인성에 따른 표현이기 때문에 성경의 통일성과 일관성에 어떠한 의심도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교부들은 그리스도 신성과 인성의 본성적 합일 속에서의 속성적 교류라는 가정에 기초하여 성경에 때때로 언급되는 그리스도의 제한적 지식이 지식의 실질적인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omniscientia)의 숨기는 성격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거스틴 입장을 따른 자들은 그리스도 신성의 무한성과 인성의 유한성 사이의 자유로운 교류를 거부하고 그의 인간적인 지식이 지닌 한계성을 그대로 인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인성에 의한 하나님 지식은 그 어떤 인간적인 하나님 지식과도 비교될 수 없도록 높고 광대하기 때문에 그런 차별성 개념을 담아낼 신학적 정밀화 작업이 뒤따라야 했습니다. 중세 프란치스칸 계열의 신학자 알렉산드 헤일즈(Alexander Hales, 1185-1245)는 그리스도 영혼이 창조된 지혜를 가졌다고 말하면서 이를 합일의 은혜로 말미암은 지식, 통찰의 은혜로 말미암은 지식, 완전한 본성의 지식, 경험의 지식 등으로 나눕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도미니칸 출신의 토마스 아퀴나스 경우에는 예수님의 무죄성에 기초하여 예수님은 천상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는 듯한 하나님 지식을 가졌지만 그의 본성적 연합 때문에 천상에 거하는 성도들의 지식과는 무한히 다른 차원의 하나님 통찰(visio Dei)이 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영혼에는 삼중적인 지식, 즉 천상적 지식(beata), 주입된 지식(infusa), 취득된 지식(acquisita)이 있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 대한 것으로서 그 보화는 그리스도 인성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대부분의 중세 인물들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과 피조물에 대한 지식으로 구분한 후 그리스도 영혼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모든 절대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피조물에 대해서는 모든 만물의 주이시기 때문에 그 본질과 능력과 움직임 모두를 전적으로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에 관한 한 그리스도 영혼은 하나님과 동일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만물의 원인이 되시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아시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 영혼은 스스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만 아시기 때문에 아는 방식과 양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신성 자체보다 비교할 수 없도록 열등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세 인물들은 그리스도 영혼에 있는 만물의 우주적인 지식을 하나님의 속성인 전지로 여기지를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의 논증을 적용하여 전능의 속성이 그리스도 인성에는 돌려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중세적 이해에 반기를 든 루터주의 학자들은 먼저 그리스도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은 본성적 합일에 의해서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루터의 입장을 따라 신성과 인성은 하나의 인격을 구성하기 때문에 한 본성에 해당되는 것은 당연히 전 인격에 해당되어 한 본성의 속성은 비록 본성간의 혼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본성에도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이 고통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여자에게 태어났다 등의 표상들을 수용하며, 인간 그리스도를 전능하고 전지하신 온 세상의 창조주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서술의 정당성은 그리스도 신성이 수난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인성이 전능과 전지의 속성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며 고통을 받으신 그 인간이 하나님 자신이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위격의 통일성 속에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즉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주입되고 창조된 지식은 그리스도 인성에 있고 절대적 전지는 그의 신성에 있기 때문에 창조되고 창조되지 않은 지혜의 모든 보화가 한 인격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위격적 합일(unio personalis)과 본성적 교섭(communio naturarum)에 기초한 속성의 교류를 루터주의 학자들은 세 가지의 종류, 즉 본성적 교류(genus idiomaticum)와 성과적 교류(genus apotelesmaticum)와 특성적 교류(genus maiestaticum)로 나눕니다. 본성적 교류는 한 본성의 고유한 속성들이 전인격에 이전되고 적용되는 것을 의미하며, 성과적 교류는 전인격에 속한 구속적 기능과 행위들이 신성과 인성 각각에 대해서도 진술될 수 있음을 뜻하며, 특성적 교류는 인성이 신성의 속성들로 옷 입히운 바 되며 신적으로 강화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종류의 교류도 굳이 말한다면 인성적 교류(genus kenoticum)를 언급할 수 있겠는데 이는 인성의 특성들이 신성으로 교류되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성자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셨을 때에 자신을 비운 것은 신성에도 영향을 주어 상대적인 신적 속성들(전지성, 전능성, 편재성)까지 비웠다는 것입니다. 사실 과거의 루터주의 학자들은 네번쩨 종류의 교류를 ‘끔찍하고 불경한 교리’라고 정죄를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케노틱 기독론 학자들(kenotic christologists)은 이 네번째 종류를 더욱 발전시켜 칼케톤 신조의 그리스도 두 본성 교리를 변증하며 신조보다 엄밀하고 정교한 표상 찾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바라본 그리스도 신학은 무엇보다 인간 예수님께 있는 하나님 지식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에게 있는 신적인 자기지식 사이의 차이점 및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지식과 믿는 우리에게 가능한 하나님 지식 사이의 차이점을 해명하는 인식론적 규범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학을 최초로 체계적인 신학서론 안으로 끌어들인 유니우스는 그리스도 신학을 ‘신인이신 그리스도, 즉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그분에게 그의 인성을 따라 교통되는 신적인 것들에 대한 모든 지혜(tota sapientia rerum divinarum communicata cum Christo θεανθρώπῳ, id est, qua sermo Caro factus est, secundum humanitatem eius)’라고 했습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대부분 성자께서 인성과 연합하실 때에도 원형적인 신학을 보존하고 계셨으나 그리스도 인성의 하나님 지식은 비록 다른 모든 유한한 형태의 하나님 지식보다 월등하긴 하나 여전히 유한한 것이어서 무한한 원형적 하나님 지식을 가지지는 못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신적인 지혜의 교통과 관련해서 왈레우스는 본성적 연합(unionem hypostaticam), 직관적 바라봄(visionem intuitivam), 엄밀한 의미의 계시(revelationem stricte sumptam)라는 세 가지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성적 연합은 그리스도 신성과 인성 사이의 완전한 지혜의 교통 및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직에 필연적인 지식을 교통하는 방식이며 무한한 신적 지혜가 그리스도 인성에 전달되는 방식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퀴나스 입장을 어느 정도 반영하되 지복의 지식(scientia beata)은 거절했던 튜레틴의 입장에 따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육체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의 인성에 속한 지식은 주입된 지식과 취득된 혹은 경험적인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입된 지식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늘의 신령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며, 취득된 지식은 경험과 결론 도출하는 합리적인 과정을 따라 이성의 빛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자연적인 지식(scientia naturalis)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인성의 하나님 지식이 유한한 것이라고 제한한 이유는 ‘유한이 무한을 담지 못한다(finitum non capax infiniti)’는 개혁주의 경구로 잘 설명될 수 있는데 이는 본성적 합일 속에서 두 본성의 혼돈이나 속성의 본성간 주입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위의 개혁주의 경구는 또한 ‘이성이 계시의 유한성을 넘어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후기 중세의 유명론적 언명을 반영하고 있어 보입니다.

루터주의 주장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인성을 따라서도 무한한 신적 지혜를 가졌다고 한다면, 신성과 인성의 교류 및 본성적 연합에서 신적인 속성의 인성 속으로의 주입은 인정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절한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신적인 본성과 인간적인 본성을 가졌으며, 또한 그런 방식으로 두 의지와 두 지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하면서 신성과 인성은 각각의 고유한 지식을 가졌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신성에 속한 지식은 실체적 비공유적 지식이며, 인성에 속한 지식은 성향적 공유적 지식이라 했습니다. 나아가 인성에 따른 그리스도 신학은 타락 이전의 인간적인 신학과 천상에 있는 성도들의 신학보다 월등한 것으로서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적인 지식의 가장 높고 궁극적인 형태의 신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인성에 따르는 그리스도 신학은 원형적인 신학과는 달리 창조되고 유한하며 성향적인 모형적 신학이라 할 수 있으며,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신학의 원리로서 인성과 연합된 신성의 빛으로 조명을 받은 신학이기 때문에 피조된 본성의 방식에 따른 신학들 중에 ‘가장 절대적인(absolutissima)’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성경은 지혜의 자람과 ‘무지’를 그리스도 인성에게 돌리면서 동시에 그는 모든 것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한 이오타도 간과되지 않고 해석학적 첨삭도 가하지 않으려는 개혁주의 학자들의 적정과 절도가 잘 반영된 진술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신학을 논해야만 하는 실천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지식을 추구하되 넘지 말아야 할 신학의 경계선은 무엇이며 어떠한 차원의 지적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까지 추구해야 신학의 정상에 도달하는 것인지를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의 무절제한 호기심과 현세적인 유익의 달콤한 유혹에 이끌려 그리스도 신학이 그어 놓은 나그네 신학의 경계선을 함부로 범해서는 안될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아시는 그 지식에 이르기도 전에 마치 신학의 달인이 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거나 모래 위에 세운 지성의 천박한 신학 상아탑에 도취되어 지혜에서 자라가신 그리스도 예수의 신학까지 자라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중단하고 자람의 필요성도 멸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성경적 정보를 취득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않았으며,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의 구체적인 완수를 위해 행위 지향적인 지식을 추구하신 것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깡그리 무시하고 신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교통으로 어떤 새로운 하나님 지식을 추구하고 설파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향하여 기록된 모든 말씀들이 응하도록 그것들을 가장 정확하고 엄밀하게 존중하고 준수하되 아버지의 완전한 뜻을 알고 그 뜻대로 되기를 전심으로 소원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또한 단순히 행위로 옮겨야 할 행동지침 지식에 정통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전인격과 전인격적 반응을 요구하는 의와 인과 신이라는 율법의 보다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들을 추구했고 성경 전체가 의도하는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정확하게 알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지식이 정보가 아니라 그것을 먹고 살아야 하는 영의 양식이며 당연히 우리 안으로 흡수되어 구별될 수 없도록 그 말씀이 나의 전 존재와 호흡과 행위와 뜻과 목적을 주관하는 원리이며 지혜이며 능력이며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장 연약하고 절박하고 비참한 상황 속에서 사단과 싸워 능히 이기는 해법으로 증거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신학이 그리스도 신학의 토대와 원리와 목적에 분리될 수 없도록 결부된 것이라면, 책상에 앉아 성경책을 해부하고 서재의 즐비한 고서에서 떨어지는 세월의 먼지 속에서 문자를 해독하며 거기에서 축출된 지식을 질서 정연한 체계에 담아 통일성 있는 하나의 지적 세계를 구축하는 것만이 우리의 신학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구체적인 삶의 그릇에 진리의 살아 숨쉬는 역동성을 담아내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신학을 본받고 그 경지에 이르는 목적과는 무관하게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의 신학’을 추구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신학적 지식을 산출하는 자가 따로 있고 그것을 실행하는 자가 따로 있어서는 결코 우리의 신학을 통해서 그리스도 신학이 그 고유한 자태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신학교와 교회가 분리되고 교회와 삶의 현장이 분리되는 기현상이 펼쳐지는 가장 심각한 원인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맡은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아시는 것처럼 신학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남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자신의 옳음을 과시하고 자신의 지적 유희만을 추구하되 양심의 가책과 타인의 비판을 살짝 피해가는 정도의 가식적인 목회적 활동을 이력에 가미하는 교활함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으며,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으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하나됨은 그리스도 인성의 하나님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요 방식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우리의 하나됨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주셨다는 것은 칼빈이 주석한 것처럼 하나님의 살아있는 형상(viva imago ipsius)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이 없는 우리의 신학은 불가능한 것이며, 신학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온전히 본받지 않는다면 신학은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방식으로 그 안에 살아 계시지 않은 신학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신학자라 칭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그의 형상을 온전히 본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탁월한 신학자일 것이며 그런 자들이 산출한 우리의 신학만이 교회에 소망을 주고 세상에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학자’는 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한 제도적인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지식을 추구하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컫는 포괄적인 말입니다.

마음에 쌓인 것이 신학의 내용으로 나오는 법입니다. 지성의 활동으로 수집된 지식 짜집기로 연출된 신학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마음에 쌓인 선으로 선을 행하고 마음에 쌓인 악으로 악을 행하듯이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가 신학의 능력과 내용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신학이 교회의 활동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정의를 보십시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충만이 교회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교회에서 산출되는 모든 것들이 신학의 내용이라 한다면 결국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한 교회만이 그리스도 신학의 모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가득한 사람만이 진정한 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 예수의 신학은 철저하게 인간인 우리가 그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결코 산출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지 않으면 신학은 학문의 유희와 괜찮은 명성을 추구하는 수단의 일환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학이 고려되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신학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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