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항은 인간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신학의 목적이란 말의 의미를 이것보다 더 잘 설명한 것은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영원히 향유해야 할 궁극적인 대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정통 장로교의 개혁주의 신학자 로버트 레이몬드(Robert Reymond)는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신적인 속성의 총화(the sum total of all his attributes)’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신적인 속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찬양하되 하나님의 모든 신적인 속성에 전인격과 삶 전체가 참여하는 입체적인 찬양을 뜻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증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이 흉내도 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것은 어떤 언어(lingua)로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에 곡조를 붙여 읊조리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영광과 덕인데, 그런 부르심에 합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삶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과 경건의 모든 것들을 통하여 영광과 덕에 이르는 궁극적인 모습은 ‘신적 본성의 참여자(θείας κοινωνοὶ φύσεως)’라 했습니다(벧후1:4). 칼빈은 이 부분을 주석하며 복음의 목적(evangelii finem)은 우리가 하나님께 합치되는 것(conformes Deo)이라고 하면서 조심스레 ‘신격화(deificari)’란 표현까지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인격이 참여하는 하나님의 본성(natura)은 신적인 실체(essentia)가 아니라 신적인 특성(qualitatem)임을 곧장 밝힙니다. 나아가 칼빈은 복음의 목적인 ‘신격화’를 플라톤도 잘 알았다고 말합니다. 칼빈이 인용한 플라톤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의 최고선(summum hominis bonum)은 우리가 철저히 하나님께 합치되는 것(Deo fieri penitus conformem)입니다.
베드로의 신적인 본성 참여자 개념 혹은 하나님께 합치되는 복음의 목적은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롬8:29).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택자들을 향해 정하신 뜻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 복음의 목적, 인간의 목적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룸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전인격적 찬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는 언어와 곡조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신학의 목적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거룩한 속성을 언어로 고백하고 가락을 넣어 찬양하되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전인격에 온전히 세기고 삶의 입체적인 입술을 열어 향기와 열매로 선포하는 전방위적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학의 목적은 또한 하나님을 최고의 선으로서 영원토록 향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의 이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때에 그 의미는 하나님만 기뻐하고 하나님만 신뢰하며 하나님만 소망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나님만 따르고 순종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만 두려워 할 자로 알며 하나님 자신만을 유일하고 ‘지극히 큰 상급’으로 여긴다는 것을 뜻합니다(창15:1).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되신다는 것보다 더 크고 궁극적인 신학의 목적은 없습니다. 칼빈은 창세기 15장 1절을 주석하며,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떠한 위험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완전한 방패가 되시며 ‘우리에게 가장 위대하고 충만한 선의 완전함은 하나님 안에만 있기 때문에(in solo Deo summam ac plenam nobis esse bonorum perfectionem)’ 최고의 선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사나 죽으나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시간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전적으로 참여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유하는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하나님과 합치되는 것과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만세 전의 작정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과 온 세상을 창조할 때에 설정해 두셨던 목적인 동시에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지극히 크고 최종적인 선물로 주시는 신학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목적에 충실한 신학자와 목회자와 성도의 참모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만을 향유하며 만족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이러한 신학의 목적이 실종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신학자의 문제이고, 다음은 교회 현장에서 가르치는 목회자의 문제이고, 그렇게 부실하고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를 옳다고 여기며 덩달아 춤추며 즐기는 성도들의 문제가 협력하여 빚어낸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가 고발했던 것과 동일한 ‘무섭고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신학의 목적에 충실한 신학자와 목회자와 성도는 다른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만을 구합니다. 그는 땅에서 주어지는 죽 한 그릇 먹으려고 하늘에서 주어진 장자권을 내던진 에서처럼 땅에서 제공하는 일시적인 영광을 잡으려고 이미 손에 주어진 하늘의 영광을 내던지는 망령된 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한 것을 지향하는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다른 모든 가치의 기준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밀어내고 하나님의 영광에 입각한 판단력만 행사하는 자입니다. 신학교의 강의와 교회의 설교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돌아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하게 다른 것들을 지향하는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불이익과 불편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명예와 수입과 쾌감에 굶주린 자가 되지 마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일에 타는 목마름의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들의 원천인 동시에 최고의 궁극적인 선이 되십니다. 폴라누스 신학의 탁월성은 이 최고의 선 개념을 가장 방대하게 다루면서 다른 모든 신학적 논의보다 우선적인 전제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먼저 그는 신학의 목적을 둘로 나눕니다. 제1의 궁극적인 목적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glorificatio Dei tanquam summi boni)이고, 제2의 종속적인 목적은 합리적인 피조물의 천상적인 복(beatitudo creaturarum rationalium)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신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선(summum bonum)과 최상의 복(beatitudo)으로 구별되고 있는데 철학은 그 두 가지를 하나요 동일한 것(unum et idem)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폴라누스는 굳이 밝히며 아무리 유용한 철학적 개념도 진리로 거듭나게 한 이후에 활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모든 합리적인 피조물과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 자신이 유일하며(Deus ipse solus), 그는 모든 선의 제1원리이며 궁극적인 목적(primum principium et finis ultimus omnis boni)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철학적 관점의 결과가 아니라 성경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성경의 기록에 근거하여 유추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철학적 용어를 도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세상에 근원을 두고 발전된 본래적인 개념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에 근거하여 신학화된 개념으로 바꾸어서 쓰는 폴라누스 태도는 꼭 기억해야 할 신학자의 본입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선은 구원과 영광과 견고함과 보호 및 우리의 궁극적인 행복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omnia necessaria ad beatitudinem)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에게 그런 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선은 모든 천상적인 복의 원인이요 저자(causa et autor omnis felicitatis)가 되면서 모든 악과 비참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 자신만이 그런 분입니다. 최고의 선은 영혼에 평강(tranquillum)을 주고 모든 사악한 성향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 자신만이 그런 분입니다. 최고의 선은 모든 나쁜 일로부터 우리에게 완전하고 확고한 위로(perfecta atque solida consolatio)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에게 그런 위로가 되십니다. 최고의 선은 최고의 선에 대한 지식과 신뢰(cognitio et fiducia)가 행복과 선함을 초래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뢰만이 그런 결과를 낳습니다. 최고의 선은 최고의 선에 대한 사랑과 경외(amor et timor)가 우리에게 행복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사랑과 경외 뿐입니다. 최고의 선은 완벽해야 하고 충만해야 하고 지극히 갈망해야 할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perfectus, sufficiens et summe desiderabilis) 하나님 외에는 그런 완벽과 충만과 지극한 갈망의 대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선의 첫번째 원리라는 뜻을 가진 제1 이데아(prima idea)가 되시기 때문에 최고선이 되십니다. 이처럼 폴라누스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식적인 논리의 틀을 활용하고 일상에서 묻어나는 용어를 가지고 신학적 개념을 풀어내는 평이하나 정교한 논증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선이라고 했을 때에 우리는 이런 규정이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는 절대적인 개념인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바꾼다는 동전의 이면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최고의 선이라고 고백하는 폴라누스는 그 이면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즉 영광, 쾌락, 지혜, 정직, 권위, 권세, 부귀, 능력, 불멸, 은총, 은혜, 운명, 경건 등은 최고의 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최상의 궁극적인 복이 아니라 종속적인 복(subordinatus)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종속적인 복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먼저 구하면 이후에 그 결과로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서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목적 자체로서 추구하지 않고 종속적인 결과를 취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이는 믿음의 조상에게 자신을 ‘그의 지극히 큰 상급’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하심을 땅의 썩어 없어지는 결과적인 복보다 못한 것이라고 멸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멸시에 신학이 앞장서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사실 신학의 올바른 목적에서 시작되지 않고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 신학이 시대의 욕심과 정욕에 아첨하며 시녀의 역할을 스스로 자처하는 일들은 결코 희귀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할례도 레위와 시므온에 의해 보복의 수단으로 동원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참으로 끔찍하고 두려워 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학문과 사유와 삶과 역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드높이고 하나님의 교회에 시대를 따라 가장 좋은 꼴을 먹이는 수종 드는 자리를 걷어차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에서 모욕을 받으며 교회가 역겨운 욕심과 살벌한 경쟁의 온상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그런 영적 하극상 연출의 주역은 아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돌아보길 권합니다.
이로써 신학의 정의와 관련된 첫번째 논의로서 신학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이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의 간략한 논의를 접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학의 주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앞서갈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학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 외에 다른 것은 알려고도 자랑치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루터가 '우리의 신학은 십자가 뿐이라(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고 규정한 것은 결코 외면할 수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 중단하면 안될 일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가르쳐 주시고 우리로 신학에 뛰어들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게 하시려는 만세 전의 작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믿음의 조상 및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주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께로 우리가 돌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의 정의를 벗어난 ‘신학’은 본질상 신학이라 할 수 없으며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아무리 허다한 구름 떼 같이 달려 들고 우매한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할지라도 신학의 탈을 쓴 인간학일 뿐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만이 내 안에서 신학을 행하시고,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신학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만 존귀하게 기념되는 것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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