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5일 일요일

성경의 완전성 Sufficientia sacrae scripturae

'완전'이란 말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사실 인간은 '완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각자의 기준에 충실한 '완전'의 불완전한 개념들이 있을 뿐입니다. 당연히 성경의 완전성(sufficientia sacrae scripturae) 개념이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완전한 것이라고 그냥 '인정'하는 것은 간단할 수 있겠으나 그 완전성의 구체적인 특성을 정확히 규명하지 않으면 극단적인 오류에 빠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첫번째 오류는 성경이 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어떤 것에 대해서도 무조건 완전한 것이라는 ‘성경주의(biblicism)’ 맹신인데, 이런 맹신자는 주로 성경의 문자적인 측면을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삶 전체에 적용하려 하기 때문에 현실의 삶을 인정하지 못하고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시대성 속으로 회귀하는 삶의 양태를 보입니다. 두번째 오류는 이런 성경의 첫번째 맹목적인 완전성 개념을 과도하게 부각시켜 그것을 트집의 빙거로 삼아 성경은 구시대의 철지난 문헌에 불과하고 오늘의 현실과는 무관하며 모든 면에서 쇠퇴한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의미의 완전성 개념마저 거부하며 성경은 고대인의 글이요 옛 시대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세번째 오류는 성경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내면적인 빛과 교황과 주교 및 전승이나 구전 등으로 보충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을 취하는 분들은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첨삭하는 일에 무모한 용맹을 떨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카톨릭은 초자연적 계시가 사도들을 통해 기록된 성경으로(in libris scriptis) 전해진 것도 있지만 기록되지 않은 전승들(sine scripto trandionibus) 안에도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는 입장까지 취합니다. 나아가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일종의 필연성에 의해 강제된(necessitate quadam coacti) 환경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며, 내용에 있어서도 우연적인 기록들 뿐이고 교회의 가르침과 삶에 필연적인 것들은 대단히 빈약하기 때문에 기록된 계시의 임의적인 유용성이 전통의 필연성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오류를 털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님은 스스로를 진리라고 했지 습관이라 칭하지 않았다(Dominus noster veritatem se, non consuetudinem cognominavit)’는 터툴리안 및 ‘진리가 없는 습관은 캐캐묵은 오류일 뿐이라(consuetudo sine veritate vetustas erroris est)’고 한 키프리안 경구를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네번째 오류는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소위 순수한 ‘직통계시’ 한 방이면 만사가 형통인데, 굳이 수천년의 쾌쾌한 세월의 부식으로 누렇게 녹슬고 추악한 죄성의 떼가 새카맣게 묻은 성경의 기록된 계시까지 촌스럽게 읽고 연구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오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나 그 자체로는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 역사적 정황, 문화적 배경, 어원적 의미, 문법적 개념, 과학적 해석의 도움으로 온전성을 보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인의 기준에 속시원한 해법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정합성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수용하는 함정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학문과 과학이 발달하면 성경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맞인 듯 하면서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논할 때에는 먼저 성경이 누구에게 완전한 것인지, 무엇에 대하여 완전한 것인지, 어떻게 완전한 것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에 있어서 완전한 것이며, 외부에서 규정해 준 완전성이 아니며 성경 자체가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기준을 따라서 완전한 것이며, 성경이 언어로 되어 있더라도 독자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완전성이 보증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경은 인간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푸는 열쇠라는 차원에서 완전한 것이 결코 아니며, 인간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하고 말고를 따라 그 완전성이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성경이 하나의 거룩한 ‘자료’가 아니라 ‘원리’라는 말의 의미는 성경이 다른 것에 의해서 분석되고 판단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준과 권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외부의 어떤 권위나 보충에 대한 필연적인 의존 없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일 수 없다는 주장은 결코 타당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되 모든 전제들과 기준들을 제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자 태도를 취함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거룩하고 완전한 말씀임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 자체로는 어떠한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완전과 충분은 피조물과 무관하며 원래부터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완전하고 우리가 보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비록 단 하나의 반증도 발견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여전히 피조적인 완전이요 피조적인 충분일 뿐입니다. 땅의 모든 완전성은 하나님 의존적인 완전일 뿐입니다. 최우수 성적을 받고 최고의 수익을 올리고 최고의 이윤을 취득하고 최고의 찬사를 받고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최고의 직장에 취직하고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는 어떠한 완전함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어떠한 완전과 충분도 없다는 의미에서, 전도자는 눈에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마음의 욕망을 억눌러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들을 취하였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헛되다’는 피조물의 최종적인 결론에 방점을 찍습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없으며 당연히 완전한 것을 분변할 수 있는 기준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송곳처럼 뾰족한 비판과 차가운 멸시를 가한다는 것은 인간의 무지와 교만을 방증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외부에서 어떤 기준이 승인하고 확인시켜 준 교리가 아니며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인 주장도 아닙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성경 자체에서 발견되는 속성인 것입니다. 신명기 4장 2절에서 모세는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의 마지막 부분에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릴 것이라(계22:18-1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거품이 있었다면 감해도 된다고 했을 것이고 성경에 결여가 있었다면 보충을 명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하기 때문에 더하거나 빼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두 인용문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한 것이고, 가감의 본질은 성경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을 때에 빚어지는 일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완전성이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다 이루리라(마5:18)’ 하셨으며, 이사야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8)’고 했습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이 배반하고 반역하고 불순종을 고집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한 이오타도 없어지지 않고 영영히 설 것이라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땅의 모든 완전한 것들은 끝이 있어도 말씀의 완전함은 끝없이 넓습니다(시119:96). 당연히 ‘천지’가 통째로 소멸된다 할지라도 말씀의 완전성은 요동치 않을 것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인간이나 천지의 운명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10:35)’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말씀의 완전성은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함부로 가감하지 말아야 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불순종 여부와는 무관하게 세상 끝날까지 완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일부러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상호 교환적인 동의어와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용어의 혼돈이라 오해하실 수 있겠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동일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4장까지 보시면 저자는 예수님 이전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구약을 포함한 예수님의 계시 전체를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히4:12)’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책’이나 ‘문헌’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바울의 서신들을 ‘성경’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벧후3:16)을 볼 때 구약과 신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봄이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되지 말아야 하고 영영토록 없어지지 않는다는 성경의 진술에서 ‘하나님의 말씀’ 대신 ‘성경’이란 말을 넣어서 생각해도 그 의미는 전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은 완전하기 때문에 가감이 불가하고 가감될 수도 없다는 성경 자체의 증거에서 우리는 성경의 완전성을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완전한 것인지를 보고자 한다면, 특별히 요한복음 5장 39절과 시편 19편과 신명기 8장 3절이 우리의 시야를 밝혀 줄 것입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성경은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인데 그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성경의 완전성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들(res necessariae ad salutem)’을 완전히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준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며 눈을 밝게 한다’는 노래를 읊조리고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고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인생을 지탱하고 인간의 가치를 극도로 높이고 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보증하는 유일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을 ‘믿음과 삶에 합당한 총체적 규범(regula totalis et adaequata fidei et vitae)’이라 했던 것입니다.

끝으로, 성경의 완전성은 성경 자체의 독립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 완전성은 하나님 의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성취를 배제하면 성경의 완전성 교리는 일언도 개진할 수 없습니다. 구원에 필수적인 것들은 성경에서 제공되는 정보로 충당되는 것이 아니며 신앙과 삶의 규범도 정보의 습득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가 유지되고 생의 가치가 고양되고 희락의 길을 걷는 것은 성경공부 열심히 해서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의 계명과 지침은 그것을 그냥 행동으로 옮기면 순종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질서도 하나님께 의존적인 것처럼 순종에 있어서도 인간은 자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의도한 차원과 분량까지 이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설명으로 해명되고 전수될 문제가 아닙니다. 체험적 깨달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저자이신 하나님 자신과는 무관한 이신론적 완전으로 이해하는 자들의 삶과 신앙에는 자신이 성경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주체로 남고자 하는 은밀한 교만의 악취를 풍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자신이 기념되고 자신이 만족되고 자신이 중심에 서 있기에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성경의 완전성을 설파한다 할지라도 무덤에 회를 칠하는 수준의 껍데기 고백일 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이런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지적 욕망의 시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성경이 보여주는 완전한 차원에 복종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극미시 세계에서 극거시 세계까지 이르는 무수한 차원들을 분할하고 그런 개별 차원들이 요구하는 언어와 개념과 규칙과 어법에 비추어 보며 성경의 일상적인 언어들이 마치 전문성과 정교함이 떨어지는 것처럼 얕보고 무시하는 것은 성경의 완전성이 무엇이며 우리가 그런 완전성 자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모르는 무지와 오만의 소치일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차원을 제시하고 완전한 의미를 제공하고 완전한 질서를 가르치고 완전한 목적을 지시하고 완전한 기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종 학문들과 문화들과 행실들은 성경이 그어 놓은 적정선에 머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거기에서 더 미세하게 들어가고 거기에서 더 거대하게 확대되어 나가는 것은 연구의 일시적인 필요를 따라 잠시 시도될 수 있겠으나 머물러야 하는 최종적인 자리는 아닙니다. 다시 성경의 적정선 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식이 없습니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가지고 육안으로 관찰되지 않는 세계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신기하고 놀랍지만 거기에는 의미나 가치의 향기가 없습니다. 그것만 쳐다보는 생을 상상해 보십시오. 실제로 그것만 한 열시간 보십시오. 산소를 무의식 중에 호흡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에 걸러지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경험의 세계가 얼마나 화려하고 다채롭고 다층적인 의미와 가치와 미가 있는지를 주체할 수 없는 감사의 탄성과 더불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안식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아름다운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세계임을 생각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의 지적 탐구는 반드시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비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에게 행하신 그 크신 은혜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의 실상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글줄 꽤나 읽으며 그럴듯한 논리 몇 토막을 다듬어 냈다고 목에 힘주는 것은 대단히 유치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전능하고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피조물의 실상을 아는 지혜가 없으면 그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고 그 뻗뻗한 고개를 순순히 떨구려고 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할 것이라(잠29:1)’고 지혜자는 말합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우리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할 것과 성경을 모든 신앙과 삶 및 인생의 가치를 가늠하는 원리과 규범으로 삼으라는 것과, 성경과 우리가 충돌되는 경우에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서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절대적인 기준이며 돌이켜야 할 방향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어떠한 교회적 역사적 전통적 권위를 가진 신조와 고백서와 신학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수렵해야 할 궁극적인 안식의 좌소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각도로 진입하여 포착된 개념의 단편을 가지고 성경의 완전성을 취하고 버리는 행위는 늘 극단적 오류의 먹구름만 몰고 다닐 뿐입니다.

댓글 1개: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